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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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백학서원(白鶴書院)
   경북 영천시 화남면 삼청리
   퇴계 이황, 금계 황준량
   1555년(明宗 10))
   
   
   
원래는 백학산 아래 양강위에 세웠졌나 나중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백학서원은 명종 10년(1555) 당시 신녕 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 유림들과 더불어 화남면 백학산 아래 양강위에 건립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고 광해군 4년(1612)에 중건하였다. 효종 9년(1658)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퇴계 이황 선생을 제향하고 황준량 선생을 배향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에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서당으로 복건하였다. 1900년에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서당으로 복건하였다. 이후 1921년 이곳에 창녕조씨 문중이 중심이 되고 지역의 유지들이 힘을 합해 신학문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항일독립투사를 양성 하였다. 백학학원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로는 민족적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한 민족적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하여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등이있다.

1) 이황 : 도산서원 참조
2)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황준량(俊良) 1517(중종 12)∼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금오공 (휘)온인(溫仁)의 13세손,검교공 (휘)진(璡)의 10세손, 문정공파(금계공파)의 파조이며,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휘는 준량(俊良)이며 중종 12년(1517년 丁丑) 풍기 서부리에서 태어나다. 퇴계 이황의 문인(門人)으로 학문(學文)을 닦아 중종(中宗) 31년 진사시에 동 32년에 생원시에 합격 동35년 정시문과에 을과 제2인으로급제하였다.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손자로, 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리었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훈도로 차출되었다. 그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하였다.1544년 학정, 1547년(명종 2)에 박사가 되었고,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중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고,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상도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앞서 그에게 청탁을 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하여 신녕현감으로 나갔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죽었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기민을 잘 진휼(賑恤)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린 일도 있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로 극론하여 단양이 20여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여주는 특은(特恩)을 받도록 하였으며,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치(郡治)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祠宇)를 마련하여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목사로 나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우는 한편,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우애가 돈독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아끼지 않았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욱양서원(郁陽書院)은 현종 3년(1662)에 창건하여 문수공 이황을 봉안하고 숙종 16년(1690년)에 금계 황준량을 배향하고 있다. 고종 5년(1868년)3월9일 훼철되었으나 명칭만 바꾸어 욱양단소(郁陽壇所)로 종전과 다름없이 행해오다가 3백여년만인 1983년 계해(癸亥)에 땜을 막아 욱금리(郁錦里)가 수몰되어 욱양단소를 풍기읍 금계리 장선 마을 금양정사 앞으로 이설하였다. 욱금리의 땜 이름을 금계선생의 호를 따서 금계호(錦溪湖)라 이름하였다. 풍기읍 금계동에 가면 금양정사(錦陽精舍)가있다. 이 곳은 금계공께서 독서를 하시던 곳이며 "죽령의 밑 금계의 위에 돌아가고자 그 곳에 두어 칸 집을 지어 금양정사라 이름하고 책을 쌓아 도를 궁구하는 자리로 삼고 독실하고도 학문을 좋아 하는 의지로 심신을 침착하게 하여 수양하려 하였는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안타깝다." 퇴계 선생은 그 의 제자인 (휘)준량이 돌아 가신 뒤 행장을 직접 쓰며 이 금양정사를 떠 올렸다고 한다.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16권 5책이 있는데 초간본(初刊本)은 1567년경 스승인 퇴계의 편차(編次)를 거쳐 단양(丹陽)에서 간행되었다.

민족교육 요람 백학서원 ‘폐허’로 방치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열사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민족교육의 요람 백학서원이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방치돼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백학서원은 1555년(명종 10) 당시 신녕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유림들과 더불어 양강소 위 백학산에 건립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12년(광해군 4)에 중건했다.
1658년(효종 9) 현재 위치인 화남면 안천리로 옮겨 퇴계 이황 선생을 제향하고 황준량 선생을 배향했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서당으로 복건했다.
이후 1921년 창녕조씨 문중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이 힘을 합해 신학문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을 건립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많은 항일독립투사를 양성한 곳이다.
지금은 기와와 담벽이 심하게 훼손돼 있고 마당에는 양봉을 하고 있으며 볏짚과 박스를 쌓아놓은 채 폐허상태로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열사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민족교육의 요람 백학서원이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방치돼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백학서원은 1555년(명종 10) 당시 신녕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유림들과 더불어 양강소 위 백학산에 건립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12년(광해군 4)에 중건했다.
1658년(효종 9) 현재 위치인 화남면 안천리로 옮겨 퇴계 이황 선생을 제향하고 황준량 선생을 배향했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서당으로 복건했다.
이후 1921년 창녕조씨 문중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이 힘을 합해 신학문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을 건립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많은 항일독립투사를 양성한 곳이다.
지금은 기와와 담벽이 심하게 훼손돼 있고 마당에는 양봉을 하고 있으며 볏짚과 박스를 쌓아놓은 채 폐허상태로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제 문헌에 나타난 백학서원(白鶴書院)에 대한 기록
1. 화산지
백학서원은 신녕현 동쪽 30리 지점의 능산(陵山)의 아래 오도리(吾道里)에 있으며 본래 서기1552년에 세워졌다.(금계 황준량공께서 신녕 현감 재임 시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백학산의 아래 양강의 위에다 서당을 건축하고서, 여러 차례 도산의 이 선생에게 질문하여 절목(節目)을 상정(詳定)하고 그 서당의 이름을 청하자 선생께서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였고, 그로 인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삼게 되었다)
임진년(1592)에 병화(兵火)로 불타 임자년(1612)에 중건하였으며, 효종조 무술년(1658)에 땅이 협소하고 위치가 궁벽하여 이곳 능산 아래 오도리로 옮겨 세웠으며, 숙종조 무오년(1678) 서당을 서원으로 하고 사당(祠堂)상덕(尙德)’ 강당을 전교(典敎) 누각을 풍영(風詠)‘이라 하였다. 고종조 무진년(1868)에 훼철(毁撤)되었다가 경자년(1900)에 다시 서당(書堂)으로 세웠다.
2. 풍영정 일고(권응도(1616~1673. 안동권씨 휘 덕시의 차자. 생원.호 풍영정)의 백학서원 이건 상량문(1658년 소작)
(중략)새로운 터를 골라 옮겨 세우니 서원의 규모 이미 이루어졌고, 옛 제도를 따라 고치니 강학(講學)의 당우(堂宇)가 이에 만들어졌네. 긴 들보 밝은 날에 들어올리니 제비들이 두루 청금(靑衿)을 축하한다.
그윽이 서원을 경영하던 처음을 생각해보니, 지난날 국가가 밝았던 때였었지. 금계께서 스스로 지은 시 귀는 벽 사이에서 아름다운 옥처럼 찬란하며, 퇴계선생의 친필로 쓰신 아름다운 편액은 문미위에서 은고리로 빛난다.
얼마나 우리 사림들의 긍식(矜式)이 많았던가? 다행히 후학을 가르치는 곳(藏修)이 되었네. 비록 왜란에 불타긴 했지만, 여러 사람의 의논에 의해 다시 세워짐을 축하한다. 유풍(遺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극한 가르치심 더욱 커지리.
존심주경(存心主敬)이라는 말씀을 외우면, 으슴프레함이 마치 얼굴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듯하며, 옥간풍대(玉間風臺)의 시 귀를 완상하면 흡사 시를 읊으며 돌아오심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제사를 드리는 예에는 마땅히 수호(守護)의 길이 넓어야겠지만, 그러나 국내(局內)가 좁은데다 하물며 산허리의 토질이 좋지 않아 묘우(廟宇)를 세우고 재사(齋舍)만들기에 불편하며 위토(位土)와 우물은 바라지도 못 함에랴.
이에 좋은 곳에 옮겨 세우니, 구서(龜筮)마저 도와 따르고, 드디어 옛 재목들을 옮기려니 장정들이 모두 나온다. 목수들의 손을 빌지 않아도 방원평직(方圓平直)이 각기 전의 제도에 꼭 맞으며, 따로 소나무를 베지 않아도 외얼점설(椳臬店楔)이 모두 그 쓰임에 적의하다.
얼마나 귀신이 아끼고 감추었던가? 하루아침에 아름다운 집을 지었네. 옛 터를 우러러 바라보니 가히 황선생의 학교를 세운 꽃다운 발자취를 상상하겠고, 걸려 있는 편액을 바라보니 위료옹(魏了翁)의 강도(講道)가 오히려 남았구나.
산의 이름은 참으로 군자들이 오를 바니, 아니 또한 풍기(風氣)가 모여드는 곳이 아니겠는가? 삼면의 물들인 산들을 마주하고 한줄기 긴 강이 비껴 흐른다.
물산(物産)은 벼와 기장 물고기와 자라의 살찌고 넉넉함이요, 사람들이 사는 것은 선비와 농부 기술자와 장사꾼의 조밀(稠密)함이니, 인사(人事)에 있어서는 아름다움을 다하였으니 다시 옮겨 지음에 무엇이 나쁘리오?
장차 성현을 높이고 받드는 의식(儀式)에는 먼저 배양(培養)의 장소가 되어야 하리. 선비들이 도를 향한 뜻에는 이로부터 더욱 힘쓰게 되리며, 민속과 상현(尙賢)의 풍토는 이로부터 더욱 진작되리라.(중략))
白鶴書院移建講堂上梁文(원문)
擇新基而移創建院之規模已成仍舊貫而改爲講學之堂宇斯作虹梁擧於白日燕賀徧於靑衿竊惟書院經始之初粵在錦溪爲宰之日錦溪之自述佳什燦瓊玉於壁間退陶之手筆華扁煥銀鉤於楣上幾多儒林之矜式幸爲後學之藏修雖見災於島夷慶重營於僉議遺風不泯至敎彌長誦存心主敬之詞怳若面承指誨玩玉澗風臺之句依如目覩詠歸享祀之禮當興守護之路宜廣然局內之逼窄況山脊之剛燥不便於立廟設齋無望乎井飮田食玆用移建於勝地龜筮協從遂因輸運其舊村丁壯畢出不借工倕之手方圓平直各得前規不斷徂徠之松椳闑店楔咸適其用幾年乎神慳鬼馝一朝焉鳥革翬飛瞻望舊基可想黃先生建學芳躅用施前揭猶存魏了翁講道山名信乎君子之攸躋抑亦風氣之所聚對三面之彩岳橫一帶之長流物産則稻粱魚鼈之肥饒人居則士農工賈之稠密在人事而盡美於改卜而何傷將有崇奉之儀先爲培養之所士子向道之志從此益勤民俗尙賢之風自玆愈振敢申呼邪之唱以贊兒郞之謠抛梁東削玉三峰聳碧空颯爽仙風來几席自然淸興滌煩胸抛梁西眼看天日遠岑低東隅雖逝桑楡在至道要存一變齊抛梁南白鶴山頭捲曉嵐忽憶先生開院日提撕怳若丈相函抛梁北普賢山勢連宸極蜿蟺淑氣此爲窮必有生全才與德抛梁上萬古高明人所仰一氣鳶魚化育行方知此理眞無妄抛梁下混混源泉流不舍進必盈科放海門須知有本如斯者伏願上梁之後賢才蔚興髦士輩出不事口耳之習專尙作成之方家程戶朱縱未探天根月窟賦宋詩李不難作錦肝繡腸不亦休哉此其大者
4. 귀애 조극성 문집
고현1)의 백학산2)은 금계 황공3)이 후학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던 곳이다. 절벽이 천 길이나 높이 서 있고 아래에는 긴 개울이 세차게 흘러가면서 백학산 아래에 이르러 물결이 출렁이며 깊고 넓게 괴어있어 깊이가 가히 배가 다닐 만 하며, 금빛 모래와 흰 자갈이 맑고도 차가우니 곧 이른바 양강4)이다.
또한 백학산의 이름은 우연히 옛 현인5)이 도의를 강학한 곳과도 합치된다. 그러므로 황공께서 이 땅을 지킴6)에 드디어 띄 풀을 걷어내고 땅을 넓혀 몇 칸의 집을 짓고 사문7)을 왕복함에 퇴계 이선생께서 손수 백학서당이라는 넉자의 글을 써 주시고, 또한 시로써 권면하시니, 이로부터 스승은 가르침을 더욱 힘쓰고 선비들은 마음을 일으켜 (백학서원의)문은 추로8)를 이루었고 교화는 청아9)에 협흡하였다.
임진왜란에 불에 타고 만력 년간10)에 한 고을의 선비들이 개탄하여 두 분 선생11)의 향사 드리는 논의가 있었지만, 옛터12)는 곧 산은 높고 길은 험하여 가히 영원한 계책이 되지 못하여 지금의 장소13)로 터를 잡아 옮겼지만, 지금에 이르러 유적은 영원히 땅에 묻혀지고 선비들은 돌아가 의지 할 곳이 없었으니, 주위 한 경내의 유식한 선비들이 더욱 (선현들을)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여 늦은 봄날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이 약속하여 양강에서 목욕하고 백학산에 올라서 종일 시를 읊고 노래함이 약간의 글이 됨은 모두 옛사람의 뜻14)을 잊지 못함이었다.
그리하여 현명한 고을 수령15)의 도움을 입어 서문을 붙이고 아울러 칠언율시를 주었으니, 어찌 바로 당일 논 선비들의 흥이 옛사람보다 더욱 빛남이 아니겠는가? 이에 졸고를 드려 감히 밝은 가르침을 바라노라
산은 절로 아득하고 물은 절로 밝으니
백년의 옛 자취는 사라져 소리가 없어라
풍광은 당시의 정취를 덜어내지 못하고
사모하는 마음은 두루 오늘 술잔에 넘쳐난다
사라지고 자라나는 금단16)에도 계수나무는 늙어가고
많고 성한 옥패엔 고운향기 맑구나
오늘의 놂 어찌 한가함을 훔쳤으리
고개 들었다 숙이는 사이에도 정감이기지 못하네
1) 조선초기 태종4년경 신녕현이 현재 위치로 오기전의 이름. 즉 현 화남면 일원을 말함
2)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에 있는 산 이름. 일명 양각산이라고도 하며 16세기 중엽 금계 황준량이 이곳에다 백학서원을 건립하였다.
3) 錦溪 黃俊良1517(중종12)~1563(명종18)
조선중기 문신
3. 남창 정제의 백학서원 풍영루 중수 기문(1761년 소작)
(백학)서원의 부임(부원장)인 이매씨가 사림(士林)들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풍영루를 중수하고 공사가 끝났으니 원하건대 한 말씀으로 기문을 삼고자 합니다'라 하는데
나를 돌아보면 글재주도 없는데다 나이가 들어 쇠약하고 늙어 정신과 지혜가 황폐하니 어이 능히 그 필요한 바에 부응하겠는가 하여 머뭇거리며 굳이 사양하는데 (기문을)청함이 더욱 근직하였다.
(그리하여)시험 삼아 지나간 일들을 살펴보니 가정34(서기1552) 을묘에 금계 황준량 선생께서 신녕 고을 현감이 되었을 때 특히 백학산의 높고 빼어나 전망이 빼어나며 깊숙하여 고요함을 사랑하여 공무(公務)를 본 여가에 이 곳에 올라 유람하며 즐기다가, 드디어 고을의 여러 분들과 도모하여 이에 몇 칸의 정사(精舍)를 지어 그것을 학문을 갈고 닦는 장소로 삼았다.
(위토)을 두고 창고를 지어 스님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널리 선비들과 아이들을 모아 특별히 교양(敎養)을 베풀 되 법도가 있게 하고, 언제나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에는 강의(강론)하는 자리에 엄숙하게 임하게 하여 떼 지어 모여 토론하고 도의(道義)를 갈고 닦는다. 한 지역의 고요하고 외떨어진 곳이 몇 년이나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유림(儒林)들의 글을 외우고 노래하는 곳이 되었으니, 이 산이 선생을 만남 또한 어이 우연이었겠는가?
장차 옛날의 녹동(鹿洞중국 최초의 서원 이름)의 백학산과 천년이 지난 후에 나란히 아름다우니 화산의 한 지역이 가히 한번 변하여 노나라(공자의 고국인 노나라. 즉 성인의 나라)로 된 것이다.
금계 황준량은 실로 퇴계 이황선생의 빼어난 제자인데,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우러러 품의하여 (서당의)이름을 여쭈었더니 퇴계 선생께서는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시고 손수 (백학서당 이라는)넉자의 큰 글자를 쓰셔서 편액 하셨다.
이에 공은 스스로 서문을 지어 그 일들을 기록하고 또한 시 세편과 도산서원의 학규(學規)로써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를 부치셨으니, 두 분 선생의 유학을 진작하시는 하나의 방법의 뜻이 성대하지 않겠는가?
이듬해인 병진년 겨울 선생께서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셨지만 남기신 서당이 예전과 같으므로 고을의 선비들이 황준량 공이가신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이에 미상불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재가 되어버려 편액과 학규는 없어져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홀로 시판(詩板)만이 어느 선비의 집에 온전히 남아 있어 이로부터 한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서원이 있던 옛터가 잡풀에 우거짐에 대하여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어 언제나 (사당을)중수함으로 뜻을 삼지 않음이 없었다.
만력 40(1912. 광해4) 임자년에 고을의 유지인 김득우 공이 맨 먼저 의논을 내어 (서당을 중수 할)재목을 모으고 기술자들을 모집하여 옛 집을 갱신하니 포사(관리사)와 묘우가 환하게 일신되었기에 드디어 두 분 선생의 제사 드림이 논의 되었지만, 그러나 다만 땅이 한 곳에 치우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당)지음이 어려웠다.
효종조 무술년(1658)에 이양욱씨가 사림들과 의논하여 옮길 곳을 정하되 옛(사당)터의 북쪽 5리쯤 되는 오도리로 하였는데, 그 땅의 맑고 빼어남이 백학산보다 못하지 않았다.
인하여 백학산의 옛 이름(백학서당)으로 서원을 건립하여 관리사와 창고 그리고 포사를 먼저 이루었다. 기유년(1669)에 이성춘이 강당을 만들고 정사년(1677)에 이동석이 사당(묘우)을 만들었으며
이듬해 무오년(1678)에 조영하씨가 널리 도내 유림(선비)들을 맞이하여 3월의 두번째 정일(丁日)에 드디어 이선생(퇴계)을 봉안하고 이로써 금계 황준량 공을 종향(從享)하였다.
서당(백학서당)으로부터 나아가 서원이 되고, 문하의 제자로 인하여(즉 황준량) 선사(퇴계)를 좆아 제사 드리니 소요하시던 향기 남긴 땅이 끝내 제사 드리는 곳이 되어, 많은 선비들의 크게 사모하는 정성으로 드디어 드높이 받드는 예를 이루었다.
봄가을 제사 드림에 번다한 의식이 깨끗하며 선비와 벼슬아치들 떼 지어 살면서 주선할 곳이 있으니, 즉 그 우러러 사모하는 도리가 거의 유감이 없구나.
그러나 만일 답답한 가슴을 풀고 정신과 기운을 펼치려면 반드시 높은 다락의 위태로운 난간과 바람 부는 기둥과 서늘한 집이 있어야 옮겨 기대며 멀리 바라 볼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다락 없음을 한할 것이다.
신사년(1701)에 한 고을이 모두 도모하여 많은 선비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에 강당의 남쪽에 다락을 만들되 기둥 넷을 하고서 편액하기를 '풍영루'라 하였으니, 이로부터 모든 선비들이 이 다락에 오를 때 그 상쾌하고 즐거움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고 해가 쌓여 바람에 쓸리고 비에 떨어져 장차 무너지는 걱정이 있었다.
지금의 임금님 재위 중이신 신사년(1761)에 김휴와 이매 권달경이 고을 어른들의 뜻으로 이에 중수를 도모하니 선비들은 즐거워하고 백성들은 모여든다. 우뚝하니 재차 새롭게 하기를 서까래가 짧은 것은 부연을 달아 길게 하고, 기둥이 아래로 쳐진 것은 돌을 깎아 이었더니 장엄하고 웅장하며 높고 크면서 빛이 난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불현듯 생소한 듯도 하지만 그 서원의 집들이 이로 인하여 또한 깊고 엄격해질 것이므로 여러분들의 고생과 마음 씀에 그 공이 어찌 크다 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다 해도 서원이 반드시 앞선 시대의 현인께서 향기를 뿌리신 땅으로 나아가 사당을 세워 높여 받들고 재사(齋舍)를 만들어 선비를 기름은 대개 남기신 가르침을 사모하여 보고 느끼고자 함이라
앞사람의 자취를 밟아 본보기로 하여 후학(후배)들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게 하는바가 있다면 우리의 도가 추락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진대, 하물며 풍과 영자의 두 글자는 대개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쇠고'자 하신 남긴 뜻에서 취함에리오?
풍영루의 편액을 반드시 이것으로 한 까닭은 그 뜻함이 더욱 깊은 것이다. 대저 증점은 성인(공자)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큰 뜻을 보았기에. 그러므로 바야흐로 기수에서 목용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쇨 적에 세속의 때(더러움)를 모두 없애버리고 하늘의 이치만 유행하여 초연히 요임금과 순임금의 기상이 있었으니, 풍과 영 두 글자를 어찌 가히 사모하고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 다락(풍영루)은 산이 감싸 안고 물을 껴안아 땅은 그윽하고 지역이 고요하니, 만일 따스한 봄날에 헌함(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맞으며 가슴 속 생각을 읊조리고 생각을 내 놓음은 진실로 가히 사람마다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증자가 시를 읊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뜻에 이르러면 진실로 속세의 더러움을 깨끗하니 벗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가히 얻을 수 없으리니, 반드시 그 모습을 천고의 위(아득한 옛날)를 상상하여 묵연히 한 마음의 가운데서 만남을 기다려 사람으로 하여금 터럭만큼이라도 마음속에 머물거나 붙여두지 않게 함은 비단 한 때의 적합함만을 취함은 아닌 것이리니, 여러 군자들은 어찌 아니 또한 (풍영루라는)이름을 돌아보고 의로움을 생각치 않으리오? 이것으로 기문으로 삼노라
白鶴書院風詠樓重修記(원문)
書院副任李君梅以其士林之意來曰院之風詠樓重修訖工願得一言以記顧余不文年紀衰耄神識荒落何能副其所需逡巡固辭請之愈勤試按其故昔在嘉靖三十四年乙卯錦溪黃先生之爲縣也特愛白鶴山之高絶而爽塏幽邃而靜閒薄牒之暇登臨遊覽顧而樂之遂與縣中諸子謀乃架數椽精舍以爲藏修之地置田設廩留僧以守廣集章甫冠童異列敎養有法每於佳辰美景講帳儼臨衿佩坌集討論書史琢磨道義一區荒閒絶境幾年隱藏於天慳地秘之中而一朝忽爲儒林絃誦之場玆山之遇先生亦豈偶爾哉將與古之鹿洞鶴山匹美於千載之下花山一境庶可以一變至魯矣錦溪公實退陶門下高弟也嘗以此仰稟於師門請其品題則先生命名曰白鶴書堂手書四大字以扁之於是公自爲序文以記其事又以三篇詩及陶山學規寓其獎勉表率之方兩先生振作一方之意顧不盛歟越翌年丙辰冬先生解歸而遺堂依舊則邑士去後之思未嘗不眷眷於斯也龍蛇之變沒爲煨燼扁額學規蕩然無存而獨詩板得全於士人之家自是一鄕人士莫不慨恨於遺址之棒蕪每以重修爲意萬曆四十年壬子鄕老金公得禹倡議鳩材募工更新舊堂庖舍齋宇煥然一新遂有兩先生俎豆之議而秖以地偏境絶難之孝廟戊戌李公陽郁議於士林移卜舊址之北五里許吾道里蓋地之淸勝無讓於白鶴山也仍白鶴舊號以建書院廚廩庖舍先成己酉李公成春作講堂丁巳李公東碩建廟翌年戊午曺公永夏廣延道儒以三月中丁遂奉安李先生以錦溪黃公從祀蓋自書堂而進爲書院以門弟而從享先師杖屨遺馥之地竟爲尸祝之所多士景慕之誠遂成崇奉之禮春秋薦芳縟儀蠲潔衿組群居周旋有地則其於瞻仰之道庶無憾焉而若夫宣暢湮鬱發敍神氣則必待夫高樓危欄風楹凉軒徙倚眺望不得不以無樓居爲恨也辛巳一鄕僉謀多士會議乃於講堂之南作樓四楹扁之曰風詠自此諸儒登臨之際其快樂何如哉而歲久年積風掣雨剝恐有傾覆之患也今上辛巳金公休李君梅權君達經以鄕父老之意乃謀修改士樂民赴突兀重新椽之短者婦椽以加之柱之下者斲石以承之翼翼渠渠輪焉奐焉回視舊日頓覺生顔而院宇因此亦增其深嚴諸公之辛勤用意者其功詎不大歟雖然書院之必就前賢播芬之地立廟而尊奉建齋而養士者蓋欲慕遺風而觀感焉蹈前軌而矜式使後學有所振起吾道無所墜失而況風詠二字蓋取曾點浴沂水風舞雩之遺意也樓額之必以此者其旨尤其深矣夫曾點遊聖人之門見得大意故方其浴沂而風雩也物累消盡天理流行超然有堯舜氣象則風詠二字豈非可慕而可效者耶今是樓也山擁水抱地幽境寂若其和煦之時憑軒引風詠懷放情固可人人而能之至於曾氏詠歸之意則苟非脫略於塵汙者不可得也必須像想於千古之上黙會於一心之中使人欲無一毫留著於靈臺不但爲一時取適而已諸君子盍亦顧名而思義哉是爲記
 
 

관리자 13-01-03 12:34
 
백학서원(白鶴書院) 답사기향토자료실
백학서원은 금계 황준량에 의하여 임진왜란 이전에 영천시 화산면 모산리에 위치한 양강소 절벽위에 세워졌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훼손되고 장소가 협소하여 그 후 화남면 능계리로 이건한 관계로 지금은 단지 그 터만 남아 있다. 나의 옛 벗인 권영주군과 함께 고허를 찾아 본 후 그 느낌을 한문으로 짓고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다.
 
白鶴書院
歲在壬午時維四月某日日傾之際,與故舊權寧柱君,尋訪於白鶴山,其故則欲見白鶴書院古址也.乃會氣候順和,日晴風良,滿目庶物,盡爲秀麗,可以知萬物得時.夫白鶴山者,所在於花山面佳上里,自永經路有二焉.一路,進入於淸通三釜茅山之路,一路,進入於道林梅山月溪之路也.我等選乎後者,以乘用車移動,停車于羊江之邊,則正對大川也.徒步以登攀,蹊間瘠路,草木蒼茂而濃綠,萬花芳發而競姸,嗚呼!天下勝處,此除而何哉?濕乎樹香,醉乎華馨,不覺光陰矣.而過一刻餘,到於羊角,忽然眼前闊然,一帶壯觀展開.千仞斷崖,花卉林林,萬落下處,菉水悠悠.仰觀穹窿,而淑氣充溢,俯見原野,而處處農人,嗟乎!是方知盛春之時也.於是向北聳然,一作高丘,世稱白鶴矣.是白鶴山,以華山爲靈源,直道南走,一轉而爲白鶴,再轉而爲睡鶴,雖其勢不爲雄偉,而時隱時出,若絶若連,不絶如縷,谷谷作邑,可以爲一區之佳處.觀乎骨伐志(永川鄕土史硏究會所作.載錄於第五集中),古有山城,本爲臨屯故址,花東城主之所築云爾.雖眞僞未詳,猶有城痕,的然示之於今人,是人棲之久可知矣.城下向離山麓,一有遺墟,是所謂「白鶴書院」之故址.然數百載而經,風雨所侵,累經兵燹,荒然廢置,而未有殘迹,使見者萬懷生焉,愴然不禁.然細心觀察,猶有瓦片礎石,便見古人創院之情,果言無證乎?夫「白鶴書院」者,古無所記,而唯有「風詠亭逸稿」中一二存焉.蓋「風詠亭」者,以人之號爲稱,姓權氏,本安東,諱應道,字士弘,號風詠亭,西紀一六一六年八月十七日,生于花山面佳上里舍第,西紀一六六二年登科于司馬試一等五人中三人,而卽歸于家,講學於新寧鄕校及白鶴書院,西紀一六七三年三月一日考終于寢處.「逸稿」云,『擇新基而移創,建院之規模已成.仍舊貫而改,爲講學之堂宇.斯作虹樑,擧於白日,燕賀徧於靑襟.竊惟書院經始之初,粵在錦溪爲宰之日,錦溪之自述佳什,燦瓊玉於壁間,退陶之手筆華扁,煥銀鉤於楣上.幾多儒林之矜式,幸爲後學之藏修.雖見災於島夷,慶重營於僉議.遺風不泯,至孝彌長.誦「存心主敬」之詞,怳若面承指誨,琓「玉澗風臺」之句,依如目覩詠歸.享祀之禮,當興守護之路宜廣.然局內之逼窄,況山脊之剛燥,不便於立廟設齋,無望乎井飮田食,玆用移建於勝地…(中略)…將有崇奉之儀,先爲培養之所,士子向道之志,從此益勤,民俗尙賢之風,自玆愈振…(中略)』(以上白鶴書院移建講堂上樑文中所載)『甲午十二月,日維二十五,新基避痘患,舊址將移寓.處置家中事,心緖多紛拏…(中略)…二十八日夕,忽有僧來拜,乃言我舅氏,再昨臨白鶴.又說今午亦,來有司朴皆,云舅氏招請我.我卽騎馬去,舅氏見我至…(中略)…念舅常獨處,思遣姪兒侍,資糧乃送之.二月日初二,臨行重寄語,學業須著力.我自送兒後,益歎身居獨,騎馬日日往,拜舅且見姪…(中略)』(以上寓中述懷中所載)以上之書,蓋嘗論之,白鶴書院創始者,則錦溪黃俊良,其時則錦溪之作新寧縣監矣.黃俊良爲李退溪之門人也.早入聖門,已涉流面,歷關內職,旣矣乃赴邑宰.所謂政者莫如習禮,莫如育民,詩禮所以敦乎性情,讀書所以使民易簡.於是周察民俗,賴乎天賦,物貨集産,民俗醇厚,而惟獨庠序未洽.雖然新寧鄕中到處散在鄕校書院,而至於大良(現花山面)及古縣(現華南面)等地,一無書院,是故兩邑之間,欲置學堂,則白鶴山者,在於兩邑之間,所在適宜,加爲勝處.然地所狹隘,而未備廟宇,僅設講堂,以爲近方來學者之講學之所也.於是以退陶之手筆爲扁而揭楣,以錦溪之自書爲訓而飾壁,其事蹟者,以詩見於花山誌及鄕錄也.然不測者天也,不堪者歲也.其後壬辰亂時倭人之所侵而毁損,世久而廢荒,鄕中有意者之爲患久矣.於是以衆議爲遷,其地則現華南面漢川里所在也,則白鶴書堂(白鶴學院)故址矣,時以考之,槪自西紀一六五二乃至西紀一六七三年許也.於是予敢自處後儒,以七言爲歌,歌曰,古人登來白鶴山,與友率牽復登臨.昔年白鶴今何在,羊江斷崖綠樹林.前修詠歸怳若見,後儒逍遙終不尋.白鶴已去故遺墟,無心花鳥得時吟.壬午寒露之節
 
백학서원 답사기(국역문-한글)
임오년(서기2002년) 4월 어느 날 오후 무렵, 나는 옛 친구인 권영주군과 같이 「백학산」을 찾았는데, 그 이유는 「백학서원」의 옛 터를 찾아보고자 함이었다. 마침 화창한 날씨는 맑고 바람마저 좋아,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모두가 아름다워, 가히 만물이 그 때를 만났음을 알겠다.
「백학산」은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에 소재 하는데, 시내에서부터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28번 국도를 따라 청통 삼거리에서 삼부로 들어가 모산으로 진입하는 길이며, 또 하나의 길은 35번 국도를 따라 도림에서 매산을 거쳐 월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우리들은 후자를 택하여 승용차로 이동하여 양강(고현천) 가에 자동차를 세워두었으니, 바로 대천리의 맞은편이 된다.
도보로 걸어 등반을 하는데, 좁고 가파른 산길의 좌우에는 나무와 풀이 무성하여 짙고 푸르며 온갖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움을 다투니, 아! 참으로 천하의 절경이로다. 나무들이 내뿜는 향기에 온 몸이 젖고 꽃향기에 취하여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산길을 걸은 지 한시간여 만에 드디어 「양각」(백학산이 있는 곳으로서 양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어 이부분은 비교적 낮은 곳이다. 지금은 바로 아래에 절집이 하나있고, 양각의 아래 고현천을 ‘양강소’라고 부른다)에 도착하니, 홀연히 눈앞이 트이며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천길 아득한 낭떠러지에는 풀과 꽃들이 자욱하고, 만길 절벽 아래에는 푸른 물이 넘실댄다. 우러러 하늘을 보니 봄의 기운이 가득 차 있고, 고개 숙여 들판을 보니 곳곳에 농부들의 모습이라. 아! 바야흐로 지금이 봄이 무르익은 줄을 알겠구나.
이에 북쪽을 보니 우뚝 솟은 하나의 산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세인들이 「백학산」이라 부른다. 이 백학산은 화산을 그 신령스러운 근원으로 삼아 똑 바로 남쪽을 향해 달리다 한번 감아 돌면서 「백학산」을 만들고, 두 번 돌아 「수학산」을 만들었으니, 비록 그 산세가 거대하지는 아니하지만 때로 숨기도 하고 때론 나타나기도 하며 끊어질 듯 이어질 듯하여 끊임이 없으며, 골골마다 마을을 만들어 가히 지역의 중심적인 곳임을 알겠다.
「골벌지」(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만든 것. 제5집 가운데 실렸음)를 살펴보면, 옛날 산성이 이었으니 본래 한사군의 하나인 임둔의 옛터이며, 화동 성주가 만든 것이라 한다. 비록 그 말의 진위여부가 상세하지는 않다지만, 지금도 성의 흔적을 확연히 볼 수 있음으로 미루어 이 땅에 사람들이 산지가 오래되었음을 알게한다.
성터아래 남쪽을 향한 산록에 하나의 흔적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백학서원」의 옛 터이다. 그러나 수 백년을 지나면서 비바람이 침범하고 여러 차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져, 현재는그 흔적마저 희미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생각이 나게 하므로, 처량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약간의 관심으로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숱한 기와 조각과 주춧돌을 발견 할 수 있으니, 문득 옛사람의 서원을 지었던 마음을 보이는 듯도 하므로 과연 증명할 것이 없다 말하겠는가?
「백학서원」에 대하여 언급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풍영정일고」라는 책 속에 백학서원과 관련 된 기록이 한둘 보인다. 「풍영정」이란 사람의 호를 말함인데, 성은 권씨 본관은 안동이며 이름은 응도 자(이름대신 쓰는 것)는 사홍 호는 풍영정으로, 서기1616년 8월 17일 화산면 가상리 사제에서 태어나 서기1662년 사마시 1등 5인중 제3등으로 등과 하였지만, 성균관 입학을 거부하고 즉시 귀향하여 신령향교와 백학서원에서 학문을 강의하다, 서기 1673년 3월 1일 돌아가셨다.
그가 남긴 문집(풍영정 일고)에 이르기를 『새로운 터를 골라 건물을 옮겨 지으니 서원을 세우는 규모가 이미 완성되었네. 옛 제도를 따라 고쳐지어 강학의 집(서원)으로 삼는다. 이에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대들보를 만들어 밝은 날에 들어올리니, 제비들이 두루 학생들을 축하하네. 그윽이 서원을 처음 경영하던 때를 생각해보니, 지난 날 황준량이 신령현감을 지낼 때였으니, 황준량이 스스로 만든 절목(서훈) 열 가지가 찬란하게 (서원의)벽 사이에 빛나고, 퇴계(이황)선생이 손수 쓰신 (서원의)편액이 빛나게 문미에 걸려있네. 많은 유림들의 모범을 바래어 다행스럽게도 후학들의 장수(藏修)함이 되었구나. 비록(임진왜란 시) 왜적들의 침입을 받긴 하였지만, 모든 이들의 의논으로 새로 세우게 됨을 경하한다. 남기신 풍교(風敎) 사라지지 아니한다면 지극한 효성은 더욱 더하리라. 「존심주경(存心主敬)」(시의 한 구절)이라는 말을 외우니 어슴프레함이 마치 받들어 마주하고 가리켜 가르치는 듯하며, 「옥간풍대(玉澗風臺)」(역시 시의 한 구절)라는 구절을 완상하니, 마치 시 읊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뵙는 듯하네. 제사를 드리는 예에는 마땅히 수호를 일으키는 길이 넓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국내가 좁으며 하물며 산등성이의 땅이 척박하여 묘우(선현을 제사하는 집)를 세우고 재사(기숙사)의 설치에 편리하지 아니하며, (더욱이)우물 물을 길어 먹고 위토답을 부치는 것을 바랄 수도 없어, 이러한 이유로써 (보다)좋은 곳으로 옮겨 세우고자 …(중략)…장차 (선현들을)숭상하고 받드는 예절에 있어서는 먼저 배양(培養)의 장소가 되어야 하리니, 선비들의 도를 지향하는 뜻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힘쓸 것이며, 백성들의 풍속이 어진 이를 높이는 풍조가 이로부터 더욱 떨쳐지리라…(중략)』(이상은 ‘백학서원이건상량문’가운데 실려 있는 내용임)
 
『갑오년 12월 25일 신기리(현 화산면 암기리)로 마마(천연두)를 피하여 옛 집(화산면 가상리 본가)으로부터 장차 우거 할 곳으로 가고자 집안 일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잡아당기는 듯하다.…(중략)…(12월)28일 저녁 갑자기 스님이 와서 (나에게)절을 하면서 나의 장인께서 이틀 전에 ‘백학서원’에 와 계신다고 말하였으며, 또한 오늘 낮에 (백학서원의)유사인 박씨가 와서 말하기를 나의 장인께서 (백학서원으로)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말을 타고서 갔더니 장인께서 나의 조카를 만나 보고 계셨다.…(중략)…장인께서 항상 혼자 계시는 것이 염려되어 조카를 보내 모시게 하고 양식을 (백학서원으로)보내 주었다. (이듬해)2월 초2일 (백학서원으로)간 길에 (조카에게) 재차 당부하기를 “학문은 오로지 (경학으로) 힘을 붙여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조카를 (백학서원으로)보낸 후에 더욱 나 혼자 있음을 한탄하여 말을 타고서 날마다 (백학서원으로)거서 장인을 찾아 뵙고 아울러 조카를 만나 보았다.…(중략)』(이상은 ’우중술회‘ 가운데 실려 있는 내용임)
 
이상의 기록으로 추론해보면, 「백학서원」의 창시자는 곧 금계 황준량이며 그 시기는 곧 황준량이 신령현감을 지낼 때였다. 황준량은 이황 선생의 제자였는데, 일찍이 이퇴계의 문하에 들어 학문을 완성하였고, 그 후 대과에 오른 후 두루 내직을 거쳐 이윽고 신령의 현감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소위 정치란 예절을 익힘 만한 것이 없고 그리고 백성을 기름 만한 것이 없다. 그것은 시와 예절은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두텁게 하는 까닭이며, 학문은 백성들을 다스리기를 쉽게 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 신녕으로 부임하여 두루 백성들의 풍속을 살펴본즉, 천부(天賦)에 힘입어 온갖 물품과 재화가 모이고 생산되며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고 두터웠다. 그가 가장 관심을 보인 분분은 교육분야로서, 고을 내 에는 향교와 서원 등의 교육기관이 산재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량면(현 화산면)과 고현면(현 화남면)등지에는 이렇다할 학교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량면과 고현면 사이에 학당을 설치하고자하여 마땅한 장소를 찾던 중 마침 백학산은 이 두 개 면의 사이에 위치하여 장소가 적의하고 또한 자연 경관이 지극히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원이 위치한 터가 좁아 묘우(廟宇:선현들에 대한 제사등을 드리는 집)를 갖추지도 못해 겨우 강당만을 설치하여, 그것으로 근방에서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다. 이에 퇴계선생께서 손수 써주신 것을 편액으로 하여 문미에 걸고, 황준량이 자신이 직접 만든 절목(원훈)을 벽 사이에 걸어두고서 서원을 운영하였다 한다.  그 사적들은 「화산지」와「신령향록」에 시(詩)로써 보인다.
 
그러나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하늘이며 견디지 못함은 세월인 것. 그 후 임진왜란 시 왜적들의 침입을 받아 헐리고 손상되고 세월이 오래되자 황폐해 졌으니, 이야말로 고을 내 뜻인 사람들의 걱정이 된지가 오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그 장소는 곧 현 화남면 한천리에 소재하며 「백학서당(학원)」의 옛 터이다. 시기로는 아마도 1652년에서 1673년쯤 으로 추정 된다. 이에 나는 감히 후유(後儒:후세의 유생)로 자처하면서 7언으로 노래하기를,
 
옛사람이 올랐던 백학산에
나는 벗과 함께 다시 올랐다
지난날의 백학은 어디에 있는지 간 곳이 없고
양강의 절벽에는 푸른 나무만 빽빽하네
전수(前修)들의 시 읊으며 돌아감 눈앞에 선한데
후유(後儒)는 아무리 헤매어도 찾지 못하네
백학이 이미 날아간 옛 터에는
무심한 꽃과 새들 때 만남을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