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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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림서원(德林書院)-미복설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초곡리
   김종직(金宗直)·정붕(鄭鵬)·정경세(鄭經世)
   1669년(현종 10)
   1676년(숙종 2)
   불향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초곡리에 있던 서원.
1669(현종 10)에 창건되었으며, 김종직(金宗直정붕(鄭鵬정경세(鄭經世)의 위패를 모셨다. 1676(숙종 2)에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했다.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뒤 복원되지 못했으며, 지금은 3칸 규모의 강당만 남아 있다. 강당은 서실과 동실 그리고 중앙 강학당으로 이루어진 한 채의 건물이었다.

1) 김종직
본관 선산(善山). 자 계온() ·효관(). 호 점필재(畢齋). 시호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53(단종1) 진사가 되고 1459(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등이 있다.
 
2) 정경세(鄭經世)
1563(명종 18)~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6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검열·봉교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고, 정언·교리·정랑·사간 등을 지냈다. 1598년 경상감사로 재임할 때 임진왜란 이후 피폐한 도민들에게 양곡을 적시에 잘 공급해주었고, 풍속 교화에 힘썼다. 그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었고,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세워 정몽주(鄭夢周이황(李滉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5(五賢)을 종사(從祀)했다. 1609(광해군 1)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나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삭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부제학·전라도관찰사·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630년 겸지춘추관사로 광해군일기편찬을 담당했다.
그는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주리적(主理的) 입장에서 '()에 동정(動靜)이 있는 까닭에 기()에 동정이 있다'라고 하여 기의 동정의 원인이 이에 있다고 했다. 또한 '이 없는 기도 없으며 기 없는 이도 없다. 진실로 선후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근본으로부터 말하자면 이가 먼저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여 현실적으로는 이기가 공존하지만, 본체론적으로 그 온 바(所從來)를 보면 이선기후(理先氣後)라 하면서, 이가 본()이고 기는 용()

이라는 ' 이본기용설'(理本氣用說)을 주장했다. 문인으로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 喪禮參考·주문작해 朱文酌解가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산 고산서원(孤山書院), 강릉 퇴곡서원(退谷書院), 개령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3) 정붕(鄭鵬)
조선시대 문신.
본관은 해주.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증조부는 정희언(鄭希彦)이고, 할아버지는 정유(鄭由), 아버지는 현감 정철견(鄭鐵堅)이다.
1467(세조 12)에 출생하여 1485(성종 16) 진사시에 입격하고 1492(성종 23)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정자·지평·정언을 거쳐 1504(연산군 10)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교리로 복직되었다가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의 도학은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말년에 청송부사로 있을 때 넓은 기량과 청렴한 성품으로 청백리로서 널리 이름을 날렸고, 선정을 베풀어 크게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 날 오랜 친구인 좌의정 성희안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청송 고을에는 응당 잣과 꿀이 많을 터이니 조금만 나누어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고 난 정붕이 즉석에서 답장을 보내기를 잣은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백성 집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찌 이것을 구할 수 있으리오(栢在高山絶頂上 蜜在民間蜂筒中 爲太守者 何而得之)’라 하였다.
답장을 받아본 성희안은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사과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말하기를 내가 문묘의 위패를 절로 옮기는 꿈을 꾸었다하며 해괴한 일이라고 탄식을 하였는데, 다음날 연산군이 성균관을 왕의 놀이터로 만들고 위패를 사찰로 옮겨 버렸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종반정 후 병을 핑계로 낙향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정붕의 도학은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퇴계 이황도 정붕의 학문의 정수를 알려면 마땅히 신당의 안상도(案上圖)를 보라하였고 또 선산은 야은 길재의 절의가 있고 정붕의 도의가 있다고 하였다. 금오서원(金烏書院)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