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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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임호서원(林湖書院)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입구
   박경신(朴慶新), 쌍둥이 아들 지남(智男), 철남(哲男)
   1920년
   
   
   삼우정 박경신 선생의 유물 4종 17점이 1996년 1월 19일 문화재 보물 제1237호로 지정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입구 우측에 옛 고가의 건물을 볼 수 있는데 임란 때의 무관(武官)으로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扈從)한 박경신(朴慶新)과 역시 임란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그의 쌍둥이 아들 지남(智男), 철남(哲男)을 배향하고자 그 후손들이 지은 임호서원(林湖書院)이다.
 
서원 초입에는 최근 또 삼우정 삼부자를 기리는 비석과 함께 나라에서 내린 각종 공신녹권(功臣錄券) 등 보물(寶物, 1237)로 지정된 포상문서 밀성박씨삼우정파 종중소장문적(密城朴氏三友亭派宗中所藏文籍)’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경의관(景義館)을 지었는데, 그 고문서의 내용은 선무원종공신록권을 위한 인증서격의 절지수((節紙受) 13매와 삼우정 박경신에게 내려진 선무원종공신록권 1책과 순조 년간 박경신 부부에게 내려진 교지 2매와 그의 모친 장씨가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별급문기 1매 등이다.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소장문적(密城朴氏三友亭派宗中所藏文籍.보물 제1237.경북 청도군 금천면 명포길 294-5 임호서원 )
이 유물들은 밀성박씨문중의 삼우정 박경신(三友亭 朴慶新)과 그의 두 아들인 지남(智男철남(哲男)에게 내린 포상 문서인 선무원종공신록훈인증서(宣武原從功臣錄勳認證書)13매와 박경신에게 내사된 선무원종공신록권1, 순조년간 박경신부부에게 증직(贈職)된 교지(敎旨)2, 조선 선조12(1579萬曆7) 박경신의 무과전시장원(武科殿試壯元)을 축하하기 위해 모친 장씨(張氏)가 급여(給與)한 별급문기(別給文記)1매 등이다. 박경신은 조선 중종 34(1539) 99일 태어났으며, 자는 중선(仲宣), 호는 삼우정(三友亭)이고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고려조 태사공(太師公)이었던 박언부(朴彦孚)의 후손으로 우당 박융(憂堂 朴融)6대손 이다. 31세 때 선조 2(1569) 무과초시(武科初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복시(覆試)에 급제했으며 3년후인 35세 때(선조61573) 전시(殿試)에서 1등으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여절교위훈련원판관(勵節校尉訓鍊院判官). 선천병마첨절제사(宣川兵馬僉節制使) 정략장군훈련원첨정(定略將軍訓鍊院僉正). 양근병마동첨절제사(楊根兵馬同僉節制使) 등에 제수(除受)되었으며, 임란 때 선조를 호위하여 피난하고, 청도에서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물리치고 청도를 수비하였다. 임란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1,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2등에 책훈(策勳)되었고 임호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장남 지남(智男15651626)은 자를 인경(仁卿), 호를 계애(溪崖)라하고 부친의 의병창의에 가담하여 청도·밀양·영천·경주 등지의 전투에 참전했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란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2등에 책훈(策勳) 되었으며, 임호서원 경의사(景義祠)에 배향(配享)되고 있다. 철남(哲男15651611)은 지남(智男)의 쌍둥이 동생으로 부친과 함께 청도·밀양 등지에서 3부자가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사복사 사복(司僕寺 司僕금위영 천총(禁衛營 千摠)을 역임하였다. 부친·형과 함께 임란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2등에 책훈(策勳)되었으며 임호서원에 배향(配享)되고있다. 절지수(節紙受)1343× 55로 저지(楮紙) 필사본(筆寫本) 낱장이며 발급년대는 만력20(선조251592) 1117만력21(1593) 312일이다. 이 문서들은 박경신 등 3부자의 전공에 대한 포상(褒賞)으로 박경신의 것이 8, 아들 지남은 2, 철남은 3매등 총 13매가 전한다. 문서마다 "형조지인(刑曹之印)"이란 도장이 3곳에 날인되어 있다. 이들 13매의 절지수는 겸순찰사(兼巡察使)의 수결(手決)이 문서마다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순찰사에 의해 발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1(34.3×22cm) 저지(楮紙)로 조선 선조38(1605)강행된 것으로 총104(30×18.8cm), 1121, 공신도감(功臣都鑑)에서 편찬되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다. 이 녹권(錄券)은 선무원종공신1등인 행부사(行府使) 박경신에게 내린 내사본(內賜本)이다.

 
1) 박경신은 밀성박씨로 153999(조선중종34)출생하여 자는 중선(中宣)이며 호는 삼우정(三友亭)이다. 31세 때 무과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복시에 급제를 하였다. 그 후 삼우정은 35세 때 장원급제를 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호위하여 피란길에 올랐고, 그의 쌍둥이 아들 지남, 철남과 함께 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도를 지켰으며 15946556세로 순직을 하였다. 임란 후 선무원종공신1, 호성원정공신2등에 올랐다.
 
2) 장남인 지남은 1565년 출생하여 자를 인경(仁卿) 호는 계애(溪崖)라 하였는데,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도 등 인근의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2등에 올랐는데 후손들이 그 충절을 기리어 본래 임호서원 뒤 경의사(景義祠)에 배향하였고, 그의 동생인 철남은 지남의 쌍둥이 동생으로 아버지 박경신, 형 지남과 함께 의병에 참여를 하였으므로 또한 형과 함께 선무원종공신2등에 올라 삼부자가 함께 경의사에 모서졌는데 나중에 후손들이 임호서원을 지어 삼부자를 함께 배향한 것으로 보인다.
 
 

密陽都護府使淸道助戰將 박경신(朴慶新)선생
 
머리말
 
1592년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쟁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피란하기에 급급하였으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와 민족을 굳건히 지킨 많은 의병들이 있었기에 7년의 전쟁에도 버틸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왜적이 서울로가는 중요한 길목인 경북 淸道와 경남 密陽지역을 목숨 걸고 지켜낸 三友亭 朴慶新 선생의 충절을 재조명함으로써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물론이고 후손들에게도 국가 보전의 중요성과 역사적 교훈이 되고자 한다.
 
三友亭 朴慶新 선생은 전투에서는 충성심이 불같았고 집안을 위해서는 모든 식솔과 여러 諸從들과 많은 가동(머슴, 하인)들에게 자애로운 어버이였고, 전투에서는 용감한 장수로서 싸움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三友亭 朴慶新 선생이었다.
1592년 임진년, 선생은 휴가차 와 있던 고향에서 왜놈들의 침략소식을 듣고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했을 뿐 아니라 선조 임금의 피난길을 호종(扈從)하고 왜적들이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서 선생은 밀양도호부사와 청도조전장으로서 오랜 전투에서 쌓인 피로누적으로 밀양도호부사 관아에서 순직하는 충절을 남겼다.
 
선생이 남긴 전투일기를 기록한창의일록淸道·密陽지역의 교전 상황과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의 전쟁에 임한 태도 등을 잘 알 수 있다.
선조임금께서 선생에게 하사한 임란1등공신 녹훈과 포상문서인 절지수 등 417점이 1996119일 정부로부터 문화재 보물 1237호로 지정되었고, 선생의 위패는 淸道郡 錦川面 林湖書院景義祠淸道郡 伊西面 龍岡書院忠烈祠에 봉안되고 지금까지 유림에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1. 선생의 생애
. 성장과정
선생의 휘는 경신(慶新)()는 중선(仲宣), 호는 삼우정(三友亭)이다.
153999일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태어나 15457세가 되던해 봄에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의 할아버지 逍遙堂(河淡)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할아버지와 도의지교로서 맺은 당대의 거유 三足堂 金大有 선생과 警齋 郭珣 선생으로 부터 글을 배웠다.
15세때 이미 사서삼경과 무경칠서에 통달함으로써 선생을 청도 서면에서는 성동(星童)이라 부르고, 동면에서는 호동(虎童)이라 불렀다.
1561년 선생의 나이 2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스스로 호를 삼우정(三友亭)이라 하였다. 선생이 호를 삼우정이라 한 것은부모님께서 우리 삼형제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온갖 고생하셨는데 우리 삼형제도 산 앵두나무 꽃처럼 하나로 뭉쳐 피어나고 참쑥처럼 잘 자라서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고 삼형제 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고자 내 를 삼우정(三友亭)이라 짓고 그 까닭을 기문으로 밝혀두는 바이다라고 하고 있어 선생의 효심과 형제간을 사랑하는 절절한 심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 벼슬 관계
156527세때 아들 쌍둥이(지남 智男, 철남 哲男)가 태어나고, 1569년 식년시 무과 초시에 급제하고 난 후 東岡 金宇顒寒岡 鄭逑를 방문하여 도의지교를 맺었으며 또 藥圃 鄭琢을 찾아가 스승으로 받들었다. 157032세때 무과 복시에 급제하고 157335세에 무과전시(武科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함으로써 훈련원 적순부위 참군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574년 여절교위훈련원주부, 다음해 현신교위훈련원판관에 승진하여 선천 병마첨절제사종사관, 1579년 정략장군훈련원첨정으로 승진하여 安東 병마동첨절제사에 임명된 선생은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는데무릇 명예에 집착하여 한 고을을 다스리게 되면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게 마련이다. 특히 물질적인 욕구에 굴복하여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마침내 스스로가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스림에 있어 가장 우선해야할 일은 자기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욕심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주민을 위한 정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청렴하고 선정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1585년 양근 병마동첨절제사, 1589년 선생의 나이 51세에 건공장군 훈련원부정에 승진하였다.
1590년 함경북도 종성에 갔다 오는 길에 圃隱 鄭夢周 先生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사당을 알묘하고 옛일을 돌이켜보며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로 완성된 영정이 봉안된 사당을 알묘하니 포은 선생의 모습에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생전의 절의가 엄숙하여 우러러 쳐다뵙니다. 선생의 절의를 흠모하는 선비가 이 나라 도처에 많은데 그 중의 한사람인 저가 가까이 지나는 걸음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고 변변치 못한 주포로서 배례를 올리오니 보잘 것 없는 작은 정성이나마 굽어 유향하소서
 
1592429일 건공장군훈련원부정에서 통훈대부 어모장군훈련원 정으로 승진되었고, 159341일 통정대부절충장군겸 첨지중추부사에 승진되어 行 淸道助戰將과 겸직으로 行 密陽都護府使에 임명되었고 1593년 윤1120일에 가선대부에 승진되었다.
 
. 관직에서 휴가를 얻어 귀향
15913월 선생의 나이 53세때 서울 남산(목면산)에 올라가 성안을 바라보며지난날 잘못된 일들이 이제사 비로소 깨달아지니 관복을 벗고 벼슬길에서 물러나야겠구나 본래부터 내가 고관대작을 꿈꾼것은 아니었는데 공명을 더 누리다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게되면 어떡하나 차라리 내일이라도 도성을 이별하고 雲門山 숲속에서 아담하게 지어놓은 고향집으로 돌아가 냇가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유유자적하리라하며 시를 남기고 그 동안의 관직생활을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5월 휴가를 얻어 섶마루 자택으로 돌아와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사슴이랑 학이랑 벗 삼고 노닐기로 다짐하니 세상살이에 찌든 때 묻은 마음은 산마루에 피어오르는 뜬 구름이 사라지듯 흩어지고 그윽한 흥취가 샘솟듯 감돌아 냇물 흐르듯 끝이 없어라하며 망중한을 달랬다.
 
1592(임진) 2월에 선생은 경북 청도군 이서면 水也里의 고향집에 가서 3월에 숙부(휘 이()) 소상을 치루고 돌아오는 길에 동생 慶因을 섶마루로 데리고 와서 지병인 창질을 고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등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있던 중 4월 별안간에 왜놈의 침입으로 부산포가 함락되는 등 온 나라가 급격한 소용돌이에 빠졌다.
 
2. 임진왜란과 선생의 창의일록(倡義日錄)
 
. 임란초기 청도 지역 전황
선생께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와 전투 과정을 기록한창의일록을 남겼다. 장서기 이기옥(李璣玉)이 정리한 창의일록은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유일한 정본이다.
 
1592413일 부산이 함락되고 14일에 동래성이 함락되어 東萊府使 宋象賢이 전사하고 17일에 密陽이 함락되고 20일에 淸道가 무너졌다.
淸道는 왜적이 침범하여 서울로 진격해 가는데 꼭 필요한 길목이다. 鳥嶺秋風嶺 남쪽은 마침내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무너져 왜적은 두 길로 나누어 한패는 조령을 경유하고 한패는 추풍령을 경유하여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나라안이 온통 야단법석이 되어도 그 왜적을 상대하는 자가 없고 왜적 무리를 물리칠 의지가 없고 또한 너무 별안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 巡察使 金晬는 후퇴하여 진주성에 머물고 청도군수 裵應褧은 적을 피해서 대구에 숨어버리고 좌병사 李珏은 병사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진격하지 못하고 우병사 曺大坤은 웅천에서 싸워 패배한 장수가 되엇다.
이 때 朴慶新 선생은 왜적이 청도읍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솟구치는 눈물을 씻고 소매 자락을 걷어붙이며임금이 욕을 보게 되었는데 신하가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일어났다.
 
. 倡義준비
420일 선생께서는 두 아들 지남·철남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기로 의논하고 편지로서 청도군 서면일대에 살고 있는 여러 제종(諸從)들을 불렀다. 그 편지에서 말하기를이번에 왜적 오랑캐들이 쳐들어와서 청도읍성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군민들이 심한 혼란에 빠져 모두 피난하느라 분주하니 이와 같은 때에 우리집안 식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스럽다. 비록 읍내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아 숨는다 할지라도 여러 제종들은 달아나 숨는 경거망동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 내말을 따르면 여러 대에 걸친 우리 가문의 조상을 받들고, 또한 우리 집안의 어른과 어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바는 너희들과 더불어 의병을 조직하여 청도에 쳐들어온 왜적을 물리칠 계략을 강구해 놓고 나는 임금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리려 달려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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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물로 지정된 三友亭선생의 유적
지정번호 : 보물 제1237
지정일자 : 1996119
소 재 지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임호서원
소 유 자 :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
수 량 : 417(선무원종공신록권 1, 선무원종공신록훈 인증서13,
교지2, 별급문기 1)
이 유물들은 密城朴氏 門中三友亭 朴慶新과 그의 두아들 智男, 哲男에게 내린 포상문서인 선무원종공신록권 1, 선무원종공신록훈 인증서 13매와 순조년간 박경신 부부에게 증직된 교지 2, 조선 선조12(1579.만력7) 박경신의 무과전시장원을 축하하기 위해 모친 장씨(張氏) 가 급여한 별급문기 1매 등이다.
5. 의병일기를 정리하라는 선생의 유언
525일 밀양부사겸 청도조전장은 밀양부에서 李璣玉에게 명령하기를의병을 일으켰을 때의 일기와 내가 써 놓은 시와 서 등의 원고를 정리하라고 하면서 서류 괘짝을 나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자리에는 나의 진외종인 박지남·철남 두 아들도 함께 있었다.
선생께서는 그 동안의 계속된 전투에서 쌓인 과로로 인해 159465일 밀양부 관아에서 순직하였는데 그 때 선생은 밀양도호부사와 청도조전장을 겸직하고 있었으며 품계는 가선대부였다. 선생의 임종은 쌍둥이 아들 智男·哲男과 내(李璣玉)가 함께 받들었다.
6월 초7일 선생의 시신이 밀양에서 섶마루로 운상해 왔는데 운상길에는 조문객과 만장이 십오리나 이어졌으며 69淸道郡 雲門面 西芝里仙達山에 있는 의흥芮氏와 쌍분으로 안장했다.
 
6. 선생의 장례식에 답지한 만장
. 경상도병사 朴晋의 만사(요약 게재)
가슴속에 간직한 일편단심 충성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속세의 어지러운 일들 다 잊어버리고 머나먼 하늘나라에서 신선이 되어 명복을 누리소서.
 
. 병조판서 李恒福의 만사(중요내용 요약 게재)
서로 사귀어온지 십여년이 지났건만 근무처가 각기 달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으나 관포의 우정을 굳게 굳게 맺은 것이 어제 같은데 오늘 벌써 저승길을 떠나다니
초월같이 만날수없는 아득한 이별이로고, 그대의 씩씩하고 뛰어난 전략과 공훈은 세상에 드물어 영남 땅에서 박 부사가 출전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그대가 다스리는 지역에는 아무리 사납고 악독한 왜적이라도 달아나지 않고 항복하지 않으면 반드시 참수당했도다. 순국했다는 기별을 접하고도 천리길 너무 멀어 달려가지 못하고 그대의 명복과 함께 끝없이 번영할 그대 가문의 훌륭한 자손들에게 대대로 많은 영화가 이어지기를 빕니다.
 
. 좌의정 尹斗壽의 만사(전문 게재)
용이 하늘을 오르듯 호랑이가 창공을 날으듯 빼어난 운문산 아래 참으로 존경할만한 훌륭한 군자가 살고 있었으니 그는 영웅호걸과 같은 풍채랑 의리로 선비와 무사의 기질을 함께 갖추고 있었기에 임진년에 쳐들어온 섬나라 오랑캐의 횡략이 말할 수 없어 고을마다 수령들이 달아나고 임금마저 용만으로 파천을 할 때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자 충성과 절개로서 단호하게 일어선 장한 분이니 그가 곧 三友亭이었다.
三友亭은 고향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흩어지는 것을 막고자 집안의 젊은이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서 격문을 돌리게 하여 청도 고장을 지키도록 해놓고 혼자 말을 몰아 임금과 사직을 위해 서울로 달려와 임금이 평양까지 피난하는 행차를 호위하고 다시 평양에서 청도까지 돌아와서 淸道助戰將密陽都護府使의 직책을 맡아 밀양과 청도를 약탈하는 왜적을 모두 무찌르고 소탕하여 密陽·淸道 양 고을을 안전하게 보전하였으니 임금에게 바친 충성과 백성에게 베푼 정성은 참으로 존경하여마지 않을 일이다. 싸움마다 승리하여 조정에 보고해 오던 密陽都護府使淸道助戰將의 중요한 임무를 누가 이어 받아 대신 수행할 사람도 없는데 홀연히 순국해 버렸으니 이 안타깝고 한스러운 일을 저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하소연하게 되었구려, 참으로 인생이란 무상한지고.
 
7. 三友亭 朴慶新 先生과 경의계(景義契)
. 경의계의 역사와 의미
景義契1927317일 당시 임호서당에서 수계(修契) 창립되었고, 발족 당시 정안(正案)에 참록(參錄)한 향유(鄕儒)591명이다. 景義契에 동참하신 제현께서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창의하고 토적함으로써 淸道密陽을 사수하신 三友亭 先生을 기리는 契名景義契라 정하였다.
경의계의 뜻을 정원영(鄭遠永) 공은 서문에서취경앙충의:取景仰忠義라 하였으니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충직한 정성을 다한 높은 덕을 사모하며 우러러 빛낸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명분이 분명한 까닭에 景義契는 수첩시(修帖時) 참록하고 향유께서 세월 따라 타계(他界)하셔도 다음 대가 승세(承世)하여 선인들의 뜻과 길을 어김없이 답습해 가고 있습니다. 景義契는 항상 三友亭 先生 현창을 위하여 노고를 경주해 왔기 때문에 1980년에는 경의사(景義祠)의 창건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景義祠에 삼우정선생의 위패를 봉안할 적에는 군유(郡儒)와 도유(道儒)가 운집하여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경건하게 진혼제(鎭魂祭)를 봉향하였습니다.
景義契를 기점으로 하면 올해 임진년이 86주년이지만 향현(鄕賢)이 앞장서서 삼우정 선생에 대한 홀대를 불용시정(不容是正)하고 나선 효시를 따지면 순조(純祖) 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실로 수백년이나 되는 장구한 세월이라 하겠습니다. 순조조(純祖朝)에도 유장(儒狀)으로써 탄원하여 삼우정 선생에게 증직의 교지가 내려지게 하고 묘당(廟堂)인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고 삼우정 선생을 주벽으로 봉안하여 세세년년 향사를 주도해 주신 향은(鄕恩)을 돌이켜보면 선생의 후예들로서는 오로지 감제(感濟)할 따름입니다.
 
박경신은 조선중종 34(1539) 99일 태어났으며 仲宣 호는 三友亭이고, 본관은 密城이다. 고려조 태사공이었던 朴彦孚의 후손으로 우당 박융(憂當 朴融)5대손이 된다.
선생이 31세때(선조 21569) 무과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복시에 급제했으며 3년 후인 35세때(선조61573) 전시에서 1등으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여절교위훈련원 판관, 선천병마첨절제사, 정략장군훈련원첨정, 양근병마 동첨절제사 등에 제수되었으며, 임란때 선조를 호위하여 피난하고 고향인 淸道에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물리치고 청도를 수비하였다. 선조 27(1594) 6556세를 일기로 密陽都護府使 관아에서 순직하였고 임란후 선무원종공신1, 호성원종공신2등에 책훈되었으며 林湖書院 경의사(景義祠)에 주향(主享) 되었다.
장남 智男(1565~1626)은 자를 인경(仁卿), 호를 계애(溪崖)라 하고 부친의 의병창의에 가담하여 淸道·密陽·永川·慶州 등지의 전투에 참전했다. 武科에 급제하였고 임란후 선무원종공신2등에 책훈되었으며 林湖書院 景義祠에 배향되고 있다.
철남(哲男):1565~1611)智男의 쌍둥이 동생으로 부친과 함께 淸道·密陽 등지에서 3부자가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사복사사복(司僕寺司僕), 금위영천총을 역임하였다.
형과 함께 임란후 선무원종공신2등에 책훈되었으며, 임호서원 경의사에 배향되어 있다.
 
 

관리자 13-01-19 13:40
 
三友亭 朴慶新 선생께서는 일찍이 정규 등용문인 무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군무에 봉직하였다.
1591년 선생은 임금으로부터 휴가를 얻어 고향 청도의 섶마루에 내려와 있던 중 다음해(1592)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武人으로서 갖추어진 군사 전략가인 선생은 두아들(지남, 철남)과 제종(諸從)들을 규합하여 4월 23일 조부 朴河淡의 사당인 仙巖祠에서 맹약문을 낭독하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창의하였다.
선생은 그날로 의병창의자들에게 직함과 소임을 부여하고 무기와 식량을 준비하여 요새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육하원칙에 의해 너무나 구체적이고 조직적이고 상세하게 기록되고 있어 마치 현재의 군사작전에 못지않은 생각을 할 정도로 지휘 내용이 너무나 완벽하다.
한 사람의 인격을 관찰하려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사람의 의식을 알아보려면 역시 세상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사람이 그 어려움에 대해서 어떠한 인식을 가졌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의를 위해 일어났어도 의를 위해 죽기란 너무 어렵고 의를 위해 죽기로 하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면서 朴慶新 선생은「임금이 욕을 보게 되었는데 신하가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왜적을 토벌하기로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멸문(滅門)을 각오하고 3부자가 함께 죽음의 전장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것과, 壬辰年 4월 23일은 의병창의기록상 가장 먼저 일어났고 淸道는 왜적이 서울로 향하는 최 요충지였으며 한 집안에서 형제, 숙질간 최다인원이 참여함으로써 충절의 고귀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우리나라가 건국이후 壬辰倭亂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었다. 이처럼 어려운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는 것은 재상보다 더 높이 받들어야할 훌륭한 인물이 아니면 안 될 일을 朴慶新 선생은 이루어 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피난길에 扈從하였고, 淸道와 密陽 두 고을을 온전하게 보전하면서 7년여의 전쟁사에 큰 획을 남겨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나라사랑의 교훈이 너무나 크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안보환경은 그때보다 더욱 불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의식에는 자력으로 나라는 지키겠다는 굳건한 국가관이 희박해지고 남이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기피현상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전 국민에게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선조들이 남겨준 유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애국심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임진란 정신문화 선양」사업이 범국가 차원에서 발전 승화되어야 하겠다. (본 내용은 임란공신숭모회에서 간행한 三友亭 朴慶新先生實記와 관련문헌에서 朴慶新先生과 두 아드님에 해당되는 핵심 기록만을 발췌 요약한 것임 : 자료작성제출자 14세손 박희상(丙戌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