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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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암서원(龜巖書院)-미복설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산 1-1
   이양중(李養中) 이 집(李 集) 오윤겸(吳允謙) 임숙영(任叔英) 정성근(鄭誠謹)
   1667년(현종 8)
   1697년(숙종 23)
   
   
구암서원은 조선 중기 1667년(현종 8)에 건립된 구천면 최초의 사원이다. 이 지역의 유생들은 여기에서 유교적인 학식과 교양을 쌓아 과거에 응시하여 관료로 입신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구천면 유생들은 둔촌 이집(李集)을 향사하고 1697년(숙종 23) 구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이집(李集), 이양중(李養中), 오윤겸(吳允謙), 임숙영(任叔英), 정성근(鄭誠謹) 등이 배향되고 노론의 색목이 강하였다. 유생들은 구암서원 건립을 중심으로 하여 향약을 조직, 유교적 마을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구암서원은 1871년 고종 때 전국의 서원철폐와 함께 사라지고, 1898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유허비와 주춧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원래 구암서원은 삼국시대 바위절터 위 에 조성된 것이며, 오늘날 구암정을 건립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
한편 구암서원지는 1986년 서울시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벌인 ‘한강변 문화유적조사’를 통해 발굴됐다.

1) 구암서원 주벽-이양중(李養中.1348-1424)
고려조 말기의 문신.자는 자정(子精).호는 석탄(石灘).본관(本貫)은 광주(廣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참의(刑曹 左 參議)에 올랐으며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서견(徐甄),이방원(李芳遠 :太宗)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우왕은 요동정벌을 하려고 매일같이 회의를 하였다. 이때 이양중은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하니 요동을 침이 불가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 때 조민수(曺敏修)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이양중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이양중은 不事二君 忠節로 당시 高麗朝 七十二賢忠節臣들과 더불어 杜門洞으로 들어가 世上과는 一切 連絡을 끊고 살았다.
이태조 혁명 초에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廣州) 남한산하(지금의 고덕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 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으니 그 글 뜻이 매우 강개울분 하여 보는 사람이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다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이양중의 집으로 왔다. 서견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 이런 변을 안 볼 것 을 하고 길재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그 무렵 태조가 이양중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 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이양중은 고려조 때 수절 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하니 벼슬로도 달랠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이양중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이양중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 버렸다. 태종은 이양중에게 한성판윤을 주어도 받지 않으므로 친히 고덕산 아래 돌여울에 와서 만나 보았다. 이양중은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렸다. 태종은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 하여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酬酌)하여 가로되
그대가 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嚴子陵)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화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화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나라 왕도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은가?하니 이양중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오.하고 인하여 길재가 황화(黃花)로 백이(佰夷)를 제사 지낸 일을 말하니 태종이 이양중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였다.
신하들이 이양중을 탄핵하되 이양중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죄 가장 큽니다.
태종이 가로되무릎을 맞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 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 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이양중을 헐뜯지 못하였다.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위에 친필로 시를 써서 이양중에게 보냈다. 그 글 뜻은술 석잔 과 거문고 한곡조를 타니 부춘산 천년(富春山 千年)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 시키지 못 하리로다.태종은 즉시 이양중의 큰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주부(司醞主簿)를 특배하였다. 後日 太宗昇遐太宗獻陵앞에 白髮에 흰 옷차림의 한 老人이 찾아와 슲으게 號哭하면서 술잔을 드리고 精誠를 올리든 그분이 바로 이양중 이었다, 이러한 일이 한갓 私事로운 일 같으나 分明하게 가르쳐준 忠節의 한 斷面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양중은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하고 묘는 수리골 에서 廣州市 草月新月리 무갑산 으로 1989년에 이장하였다. 고덕재(高德齋)와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모재(慕齋)김안국 (金安國)이 찬()하였다.
 
2) 이집(李集, 13271387)
고려 후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당()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광해군 3)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3)임숙영(任叔英, 1576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상().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창락찰방 숭로(崇老)이고, 아버지는 감역 기()이며, 어머니는 승지 정유일(鄭惟一)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한다. 1601(선조 34)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수학,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전후 유소(儒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1611(광해군 3)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적극 취하여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다.
  그 뒤 승문원정자·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다.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 곧 파직되어 집에서 지내다가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다.
  인조반정 초에 복직되어 예문관검열과 홍문관정자·박사·부수찬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 고문(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 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한다.
 
 
4) 오윤겸(吳允謙, 155916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옥정(玉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경민(景閔)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역 희문(希文)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군수 정수(廷秀)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2(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해 영릉참봉(英陵參奉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結城)에 우거했다가 부수찬(副修撰이조좌랑·지제교(知製敎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 뒤 7, 8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했으며,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한편,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해 제례 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 마련 법식을 제정해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였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으며, 이 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해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환도 뒤 좌의정을 거쳐 162870세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때 노서·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또 부묘(祔廟 : 상을 마친 뒤 神主太廟에 모심.)하려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해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열왕후(仁烈王后 : 仁祖妃)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요컨대, 선조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禰廟 : 아버지의 사당)에 해당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 : 仁祖 生父)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의견이었다. 외직에 있으면서 평강현과 경성부의 민폐를 다스려 정치를 잘한 수령(守令)으로 명성을 얻었다. 중앙관으로는 온아단수(溫雅端粹)하고 공정한 자세를 견지,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經濟)의 재주가 부족하고, 시폐와 왕의 잘못을 직언하는 기개가 모자라 평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詞章)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귀(李貴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김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귀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인척 사이의 정의(情誼)가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다만, 뒤에 노서·소서의 대립에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을 적극 추진하자 틈이 벌어졌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으나, 1663(현종 4) 충정(忠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을 비롯해 동사일록 東槎日錄·해사조천일록 海槎朝天日錄등이 전하고 있다.
 
 
 
5) 정엽(鄭曄, 156316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희년(熙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성(惟誠)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증찬성 언태(彦台)의 딸이다.
 
3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4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지함(李之菡)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수업하고, 성혼(成渾이이의 문하에 출입하여 당시의 명류들과 교유하였다. 1583(선조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의 문한직(文翰職)을 맡았다.
1587년 감찰·형조좌랑이 되었으며, 1593년 황주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장령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귀국 후 성균관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삼남대로에 있는 수원은 당시 난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나, 군민을 잘 다스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크게 칭송을 받았다. 1598년에 응교·집의로서 시강원필선을 겸하고,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나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지·대사간·예조참의를 역임했고, 영위사(迎慰使)로서 관서 지방에 다녀왔다.
이 무렵 척속 기자헌(奇自獻)이 이조좌랑의 추천을 받았으나 끝까지 반대하였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자, 성혼의 문인이었던 그도 종성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학교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때마침 오랑캐 수만 명이 침입하자 계교로 적을 물리쳤다. 이 때 피해는 피로자(被擄者) 한 명 뿐이었으나, 기자헌의 농간으로 동래에 유배되었다.
1605년에 풀려나 이듬해 성주·홍주의 외직을 차례로 맡았다. 1608(광해군 즉위년)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대사성을 거쳐, 1610년에는 충청감사가 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승지·판결사·도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도승지로 있을 때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여기는 것을 보고 직언하다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으나, 곧 참판에 오르고 1613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 사실을 밝히고자 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상소를 포기하고 도승지를 사직하였다. 1617년에 폐모론이 제기되자 외직을 구해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폐모의 조처가 단행되자 관직을 버리고 여주에 돌아와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강화도에 위리안치키로 된 광해군을 전날에 북면(北面)한 군주이므로 곡송(哭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주위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반정 초에 비변사의 합사(合辭)로 대사성에 동지경연(同知經筵)·원자사부(元子師傅)를 겸하는 중책이 맡겨져, 학제를 상정하여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는 공적을 남겼다. 이후 곧 대사간에 제수되어 대사성을 그만두어야 했으나, 국왕의 특명으로 그대로 겸하게 되었는데, 대사성으로서 타직을 겸하는 예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인조반정 이후 친명정책의 표방과 함께 후금에 대한 적극정책으로 적의 침입이 있으면 국왕이 삼군을 이끌고 송도에 진주한다는 친정(親征)의 계책이 공식적으로 택해졌는데, 이 안이 그로부터 나왔다. ,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파천의 안을 과감히 제기한 것도 그였다.
공주에 있을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환도 후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대사헌에 제수되고, 또 우참찬이 되었다. 대사헌을 다섯 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 가지 직임을 겸하기까지 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63세에 죽었다. 저서로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수몽집이 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6)정성근(鄭誠謹, ?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이신(而信)·겸부(兼夫). 자순(子淳)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대제학 척()이다. 어머니는 이양몽(李養蒙)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79년 수찬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1481년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맡을만한 인물로 추천되었고, 경차관(敬差官)으로 경기도에 파견되어 교동현의 유민(流民)을 진휼하였다. 이듬해에는 홍문관부응교로서 구황적간(救荒摘奸)하기 위해 전라도에 파견되었으며, 148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전한을 거쳐 대마도선위사(對馬島宣慰使)로 파견되었다. 1487년에는 시강관으로 경연에서 용인(用人)의 법도를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 해 직제학이 되었다. 그가 선위사로 대마도에 갔을 때, 대마도주가 주는 화선·호초(胡椒) 등을 모두 되돌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에 도주가 그 물건을 또 특별히 보내와서 나눠주게 했으나, 그가 완강히 사양하여 왕은 그 물건을 도로 대마도에 돌려보냈다.
그 뒤 해주목사를 거쳐 1490년 반우형(潘佑亨)·표연말(表沿沫)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기도경차관·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이 때 해주목사로 재직할 때의 부정으로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1494년 성종이 죽자 3년 동안 수묘했으며, 1495(연산군 1) 행호군으로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다시 정계에서 축출되었으나, 1497년에 다시 서용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되었으나, 중종 즉위 후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 되고, 그의 충효로 아들이 녹용(錄用)되었다. 1507(중종 2)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내려졌다. 또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광주(廣州)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