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안락서원(安樂書院)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1동 838
   송상현(宋象賢) 정 발(鄭 撥) 윤홍신(尹興信) 조영규(趙英圭) 노개방(盧蓋邦)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신여로(申汝櫓) 송 백(宋 伯) 김 상(金 祥)
   1605년(선조 38)
   1624년(인조 2)
   5월 25일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7호(1972.06.26지정)
안락서원은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 윤선이 임진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부산첨사 정발(鄭撥), 다대첨사 윤홍신(尹興信) 등 부산지방의 선열을 모시기 위하여 동래읍성의 남문에 송공사단(宋公祠壇)을 건립한 것에서 비롯된다. 1624년(인조2)에 선위사 이민구의 청에 의하여 충렬사란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란 때 전사한 부산첨사 정발(鄭撥)을 배향하게 되었고, 1652년(효종 3)에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송상현의 학덕과 충절을 숭상 계승하기 위하여 내산 및 안락리(현 충렬사자리)에 이전하여 강당과 동서양재를 지어서 교육기관으로 삼게 한 것이 안락서원의 기원이다.
 
그 후 1709년(숙종 35)에 동래부사 권이진이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순절한 사람들을 모시기 위해 읍성 안에 있는 충렬사의 옛 터에 별사를 세우고 정부에 알린 후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 및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 등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735년(영조 11)에는 경상감사 민응수(閔應洙)의 계청으로 1736년에 별사에 모셨던 이들을 안락서원의 충렬사에 함께 모셨으며 동시에 임진란 때 순절한 다대첨사 윤홍신을 다시 모시고 또 남편과 운명을 같이 한 송상현의 첩 김섬과 정발의 첩 애향을 충렬사의 동문 밖에 정려(旌閭)를 지어 기념하고 있다.
 
이처럼 안락서원은 임진란 때의 충신열사를 모셨기 때문에 뒷날 흥선대원군이 단행한 서원철폐 때도 헐리지 않고 근년까지 그대로 내려오다가 1977년 정부의 충렬사 성역화 방침에 따라 경역을 확장하여 사당과 기념관 등 건물을 새로 짓고 그 보존과 관리에 힘쓰고 있다. 안락서원은 창건 이래 몇백년 동안 지방민을 교화하여 충군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이 고장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하는데 큰 이바지하고 있다.

1)주벽-송상현(宋象賢, 1551∼1592)
 
송상현의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선조 3년(1570)에 20세로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정원정자(承政院正字)로 보임되었다.
 
선조 24년(1591)에서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동래부사가 되었으니 임진란의 전년이었다. 부임한 이래 성의와 신의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성의 수축, 군비를 정비하여 전란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 음력 4월 13일에 왜적이 내침하여 4월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동래성을 포위하였다. 적은 취병장(구 농주산, 현 동래경찰서 자리)에 진출하여 남문밖에 목비를 세웠다. 그 목패에는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응하여 송부사는 또한 목패에다가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戰死易 假道難」”이라는 결사의 글을 써서 적중에 던졌다.
 
그리하여 적은 3대로 나누어 14일 해가 저물기 전에 동래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15일 아침 대공세를 전개하였다. 송부사는 성중을 돌며 독전하였으나 대세가 불리해지자 조복을 갑옷위에 입고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붓을 잡아 부모님께 “외로운 성에는 달이 흐려지고 다른 진중에서는 기척이 없습니다. 군신의 의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 그 어찌 가벼우리까 「孤城月暈 列陳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이라는 비장한 결의의 글을 남기고 의연히 죽음을 맞았다.
 
이 때 송부사를 보위하던 군관 김희수, 향리 송백, 종행인(하인) 신여노, 김섬(金蟾),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부민 김상, 이촌녀 등이 격투 끝에 장렬히 전사하였으니, 이들 또한 충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이들 중 하인 신여로는 어머니가 있기에 송부사가 독촉해서 집에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집으로 가던 중 부산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공의 후은(厚恩)을 입고 난을 당하여 감히 즉음을 아낄 것인가”하고 되돌아와 함께 죽었다.
 
또 김섬은 송부사의 첩으로 함흥출신 기생이었는데 부사와 함께 죽으려고 담을 넘다 적에게 잡히자 3일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부민 김상은 기와집에 올라가 적을 치니 마을의 두 여인이 같이 기와집에 올라가서 기와를 걷어 깨어주고 김상이 기와로 적 3인을 죽이고 모두 함께 죽었다.
 
송상현은 순절한 후 선조 27년(1594) 조정으로부터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으며, 효종 8년(1657)에 충렬공의 시호를 받고 숙종7년(1681)에는 좌찬성(左贊成)에 진증(進贈)되었다.
 
 
 
2)정발(鄭撥, 1553∼1592)
 
부산진성(釜山鎭城)을 사수(死守)하다가 순절한 부산진첨사 정발(鄭撥)의 자(字)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그 원조(遠祖)는 고려왕조 때 군기윤(軍器尹)을 지낸 진후 (珍厚)로 뒤를 이어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계속하여 나왔다.
 
조선왕조 처음에 희계(熙啓)가 나서 태조의 창업을 도와 개국공신이 되니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으로 봉해지고 시호(諡號)를 양경(良景)이라 하였다. 그의 손자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지례(之禮)가 있으며, 지례의 손자에 군수(郡守) 세호(世豪)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세현(世賢)이 있다. 세현의 아들 명선(明善)은 큰 아버지 세호의 양자가 되어 간성군수(杆城郡守)를 지냈는데, 관찰사(觀察使) 남궁숙(南宮淑)의 딸에게 장가들어 1553년 (명종 8)에 정발을 낳았다. 정발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겨 했고, 과묵하여 선비의 풍모가 완연하였다. 특히 소학(小學)에서 얻은 바가 많고, 자라면서 그 형과 같이 독행인(篤行人)으로 뽑혔다 하니 그 행실이 얼마나 돈독하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약관(弱冠)에 이미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통독하였으며, 아울러 손오병법(孫吳兵法)에도 통달하였다.
 
26세 때인 1579년(선조 12) 그는 문과(文科)를 버리고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것은 무과가 문과보다 쉬운 편이므로 빨리 출세하여 홀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함과 또 세상이 장차 무과출신을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을 관망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무과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3년 재임기간 중에 선정(善政)을 베풀어 현민들이 그의 어진 정사를 칭송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침 북변 종성(鐘城)에 여진족의 침구(侵寇)가 있어 원수(元帥)의 막하(幕下)로 부임하여 구란(寇亂)을 평정하였다<span style="letter-spacing: -0.5pt; font-family: Dotum, 돋움; font-size: 9pt; background-color: rgb(255,</body></html>

임진왜란 때 충신 37인, 효열(孝烈) 4인을 봉향하고 있음으로 해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무사하였다. 사우 외에 대소 8개의 묘각이 있고, 사우와 소재당 사이에 동문·서문·중문이 있는데, 이 3문은 1972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담장을 설치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는 93,823㎡의 경역에 본전 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부산 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1)충렬사 내 유적
 
충렬사 내에는 본전과 의열각, 기념관, 소줄당, 군관청, 정화기념비, 송상현공 명언비, 임란 동래24공신 공적비, 충렬탑등 볼 유적들이 많이 있다.
 
2)기록화
 
①부산분전순국도 동래보국충정도
 
②내성수사결의도 동래민중분전도
 
③다대진성결전도 수영유격전투도
 
3)순절도
 
①동래부순절도 및 부산진순절도
 
②송상현공종가동래부순절도
 
3)유품
 
①동래부사의 갑옷 및 투구
 
②부산첨사의 갑옷 및 투구
 
③다대첨사의 갑옷 및 투구
 
④동래부사의 전복(戰服)·전립(戰笠)·혁화(革靴)
 
4)교지(敎旨) 치제문(致祭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