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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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동산서원(東山書院)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최흥원(崔興遠)
   1820년(순조 20)
   
   
   
동산서원은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의 생시(生時)에 대구부 부인동(夫仁洞)에 농연서당(聾淵書堂), 대구부 해안현(解顔縣) 칠계(漆溪)에 북계서당(北溪書堂)을 세워 문인들의 교육장소로 운영하다가 선생의 서세(逝世)후 북계서당을 동산사(東山祠)로 변경하여 선생을 배향하여 오다가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서원 건립에 대한 중론을 모아 선생의 향리(鄕里)인 칠계마을(현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1818년부터 2년간 서원 정당 및 묘우(廟宇)등 제반 건물을 건립하여 1820년 서원을 창건하여 동산서원(東山書院)이라 개칭하여 선생을 단독 향사하였다.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하다가 서원 옛터를 정비완료하고 복원 준비를 하고 있다. 동산서원 호기(號記)는 경의당(敬義堂), 진덕문(進德門), 본립재(本立齋), 지급재(知及齋), 가행재(可行齋), 인수재(仁守齋)이다.

1)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
 
조선 영조, 정조시의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백불암(百弗庵) 또는 수구암(數咎庵)이며 私諡(유림에서 諡號를 드림) 문정(文正)이다. 봉림대군(후에 孝宗)의 사부(師傅)인 최동집의 5대손이며 현감을 지낸 최수학의 장손이다. 관직은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禦侮將軍世子翊衛司翊贊이며 당세의 유림사표(儒林師表)이었으며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받으며 문하에120여명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정조임금이 세자를 책봉하며 전국에 널리 선생을 초빙할 때 가히 나라를 다스릴 경술지사라하여 도백(道伯)의 추천을 받아 세자좌익찬(世子左翊贊)이 되었고 실학에 심취하여 성호 이익선생과 교류하며 그 스승 반계 유형원선생의 반계수록을 교정할 때 나라에서 이 책의 교정을 볼 사람은 백불암선생 밖에 없다고 하여 이를 맡아 교정하여 널리 반포하였으며, 아울러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코자 사재(私財)를 내고 동민들과 뜻을 모아 부인동향약(夫仁洞鄕約)을 제정하여 세금을 내어주는 공전고(公田庫), 불우한 백성을 구제하는 휼빈고(恤貧庫)를 세워 향약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정조임금의 큰 칭송의 전교를 받았다. 생시의 부모에 대한 효성과 나라를 경영할 정도의 경륜으로 대효(大孝)라 칭송받으며 사후(死後) 나라에서 정조(正祖)임금이 소수 홍패를 만들어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고을에서 큰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15권 7책이 간행되어 있고 53년간의 일기책이있다.
 
참고(사진포함)-경주최씨옻골종가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okgol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백불암 최흥원 : 배운 바를 실천한 선비?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한 선비?
 

 
 
정진영(안동대학교 사학과)
 

 
 
 
 
<간략소개>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은 팔공산 아래 옻골에서 그 자신뿐만 아니라 5대 할아버지적부터 산 대구의 토박이이다. 최씨 가문이 대구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중반부터였으니 5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최흥원은 홀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구는 물론이고 영남을 대표하는 큰 학자가 되었고, 조정에도 그 명성이 알려졌다.최흥원의 학문은 입과 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효도를 지극히 하였고, 밖으로는 부인동에서 향약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정조 임금은 벼슬을 거듭 내려 최흥원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최흥원은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죽은 후에는 효행의 표창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의 벼슬이 내려졌다. 또한 후대의 사람들은 최흥원을 ‘대효(大孝)’를 실천하였다거나, ‘경제(經濟)의 대강(大綱)을 얻은 선비’로 높이 평가하였다.
 

 
 
백불암, 스스로를 낮추다.
 
최흥원은 1705년(숙종 31)에 태어나서 1786년(정조 10)에 세상을 마쳤다. 그는 몇 차례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대구를 떠난 적이 없는 전형적인 대구 토박이다. 조선시대의 대구는 경상도의 감영이 있는 큰 고을이었다. 경상도를 흔히들 영남이라고도 하였다. 영남에는 선비와 학자가 많기로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최흥원이 평생을 보낸 옻골은 오늘날 대구의 동구 둔산동에 속한 조그만 마을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칠계가 된다. 모두 옻나무가 무성한 골이라는 뜻이다. 최씨들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게 된 것은 최흥원의 5대 할아버지 적부터였는데, 그 때는 아마 옻나무가 무성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옻골에는 옻나무는 없지만, ‘백불고택(百弗古宅)’이라는 집 이름이 붙은 옛 집에 최흥원의 후손들이 무성히 살고 있다.
 
옛날에는 어른이나 훌륭한 분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학문이 높은 선비나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름 대신에 호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최흥원은 호를 백불암(百弗庵)이라고 하였다. 백불암이란 ‘백부지 백불능(百弗知百弗能)’에서 따온 말이니, 곧 아는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스스로를 낮춘 이름이다. 그래서 그 당시 또는 후대의 사람들은 ‘백불암 선생’이라고 불렀다. 선생이란 학문이 아주 높은 분을 존경하고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붙이는 존칭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도 최흥원이라는 이름 대신에 ‘백불암 선생님’,이렇게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불특정한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이런 글은 직접 대면해서 주고받는 말과는 달리 객관적인 사실 관계를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다. 평가는 가능한 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최흥원 혹은 백불암이라고만 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이라면 누가 그냥 ‘최흥원’이라고만 부르겠는가?
 
 
 
가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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