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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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반구서원(盤龜書院)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00-1
   정몽주(鄭夢周) 이언적(李彦迪) 정 구(鄭 逑)
   1712년(숙종 38)
   
   3월 중정(中丁)
   반고(구)서원 유허비 -울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3호(2004.12.16지정)
울산 언양의 반구서원 건립에 관하여는

1)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해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해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 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 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3)정구(鄭逑, 1543~1620)
본관 청주(淸州), 자 도가(道可), 호 한강(寒岡), 시호 문목(文穆)이다. 종이모부인 오건(吳健)에게 수학하였고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 참봉이 되고, 1578년 사포서(司圃署)주부를 거쳐 삼가(三嘉)·의흥(義興)·지례(知禮)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1580년에야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가서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까지 세워졌다. 1581년에 지평이 되고 1585년 교정랑(校正郞)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 간행에 참여하고 그 후 통천군수(通川郡守)·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成川府使)·충주(忠州)목사·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고 상소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13년 계축화옥(癸丑禍獄)가 일어나자 다시 상소를 올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고,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만들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그의 학맥은 남명 조식의 문하로 분류되나 정치적 입장에서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분류된다. 특히 남명집(南冥集)의 발간을 앞두고 정인홍(鄭仁弘)이 발문을 작성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와 절교하였으며 이로 인해 남명학파 문인들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종 때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주의 회연(檜淵)·천곡(川谷)서원, 충주의 운곡(雲谷)서원, 창녕의 관산(冠山)서원 등과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강문집(寒岡文集)≫이 있고, 편저로 ≪성현풍(聖賢風)≫≪태극문변(太極問辨)≫≪와룡지(臥龍誌)≫≪역대기년(歷代紀年)≫≪관의(冠儀)≫≪혼의(婚儀)≫≪장의(葬儀)≫≪계의(稧儀)≫≪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이 서원은 현재 양호하게 복원되었는데 목조와가로서 지붕형태는 팔작형태이다. 그러나 위치가 본래의 자리에서 옮겨졌으며 원형모습과 지금의 복원모습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외삼문에는 반구서원 현판이 걸려있으며, ·외삼문, 강당, 사우로 이루어져 있다.
1)반구서원 유허비-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2004.12.16지정)
유허비(遺墟碑)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으로, 이 비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포은선생은 1376년(우왕 2)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親元排明) 외교정책에 반대하다가 이곳에서 1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동안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감회(重陽節感懷)”라는 시를 짓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그 후 지역인들은 선생을 추모하여 반구대를 “포은대”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1712년(숙종 38) 언양지역 유생들이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세 분을 추앙하여 반고(槃皐)서원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서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대실록비(1890), 반구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의 비석를 차례로 세웠으며, 1965년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참고-울산시사, 2002.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index.jsp
울산광역시 홈페이지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