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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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태화서원(太和書院)
   울산광역시 중구 옥교동 239-1
   알평, 이거명, 이핵, 이진, 이제현, 이항복
   1797년 (정조 21)
   
   매년 음력 3월 10일
   
태화서원의 건물은 울산 도호부의 도총소였다. 일종의 면사무소였던 것이다. 상부면이 울산면이 되고는 울산 읍으로 승격한 후에는 읍사무소로 쓰였다. 1951년 월성 이씨 화수정에서 서원을 병성하고 표암공, 소판공, 열헌공, 동암공, 익제공, 백사공을 봉안하고 항제하고 있다.
정조 21(1797)에 세웠으며 정면 4,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홑치마의 집이다. 1951년 월성이씨 종중에서 서원을 설치하고 이름을 태화서원이라 부르고 있다.

1) 월성이씨 시조 알평
알평(謁平, 기원전 117년(한무제 6년) ~ 기원후 83년)은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신라 초기의 문신이며, 신라 개국 전에는 사로국의 사로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촌장이었다. 자(字)는 천서(天瑞), 호(號)는 표암(瓢巖), 시호(諡號)는 문선공(文宣公) 또는 은열왕(恩烈王)이다.[1] 일설에는 그가 유리왕으로부터 이씨(李氏) 성을 최초로 사성받았다고 하나, 그의 생전에 사성되었는가 여부는 불확실하다.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시조이자, 차성, 합천, 성주, 가평, 평창, 아산, 재령, 우계, 울산, 장수, 원주, 진주, 진위, 덕은 이씨는 그의 후손들이 각각 분가하여 창설한 가문이다.
알평은 기원전 57년 다른 6부 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를 추대하여 국왕으로 받들었다. 신라 개국좌명공신으로 관직은 각간, 아찬 등을 지냈고, 사후에 무열왕 때 신라 개국공신들을 (王)으로 추존할때 은열(恩烈)의 시호를 받아서 은열왕이 되었다. 그의 사후 이제현의 묘갈명을 쓸 때 가계를 상고하던 중 족보가 실전되는 바람에 그의 후손인 이거명(李居明[2])을 중시조로 하여 세대를 헤아리게 된다. 경주지역의 전설에 의하면 알평은 알영 부인의 친정아버지였다고도 한다. 657년(태종무열왕 3년) 왕으로 추존되어 은열왕이 되었다.
 
 
2) 이거명(李居明)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 건국의 모체인 사로(斯盧) 6부 중 알천양산촌을 다스렸던 표암공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받들고, 신라 말에 소판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 1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여 왔다.
신라 때 소판(蘇判)을 역임. 소판이라는 관직은 신라시대 골품제도(骨品制度)의 성진골품(·眞骨品)만이 천거되었으니,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왕인 무열왕(武烈王) 부터 혜공왕(惠恭王) 때까지는 진골계(眞骨系)에서 분적하여 명문호족화 하여다.
 
소판공 이거명 사단
경산 울산시 청량면 양호단소는 중시조 소판공 거명의 사단을 모신 곳이다.
소판공은 고려말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공 이제현의 묘지문에 그 선대가 신라때 소판 벼슬
을 지낸 이거명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시조이후 기록이 전하는 최초의 선조가 되었다.
 
3) 열헌공 이 핵 (悅軒公 李 翮)
()는 만리(萬里),()는 열헌(悅軒), 초휘(初諱)는 타()로서 부인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인정(仁挺), (), 세기(世基) 등 아들 삼형제에게 서책(書冊)을 직접 교육하여 모두 수석 장원(首席壯元)이 되니 이웃 사람은 팔자 좋은 열헌(悅軒)이라 부러워하니,고려 충숙왕(忠肅王) 때의 묵헌(默軒) 민지선생(閔漬先生) 꽃송이 같은 세아들 다섯 손자가 모두 장원에 급제 하였더니 세상사람들은 이태백을 닮은 재주라고 칭찬하였으며, 열헌(悅軒)공은 평소에 적선(積善)을 하여 온세상에 알려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혼자서 매년 경사(慶事)를 보는구나. 라고 칭송하였다. 벼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시향일 : 음력 3 10(격사재)
위치 :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163
 
3) 이진(李瑱) 1244(고종31)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초명은 方衍(방연),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庵), 시호는 文定(문정), 三韓功臣(삼한공신) 金書(금서)의 후손, 齊賢(제현)의 아버지. 文科(문과)에 급제, 廣州 司錄(광주사록)이 되고, 뒤에 直翰林院(직한림원)으로 기용되었다. 충렬왕이 詩賦(시부)로써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을 때 둘째로 뽑혔으며, 起居中書舍人(기거중서사인安東 府使(안동부사)를 지내고, 軍簿 摠郞(군부총랑)에 전임, 1297(충렬왕23) 右司議大夫(우간의대부)가 되었다. 그 뒤 대사성·밀직승지, 1303(충렬왕29) 典法 判書(전법판서)를 지내고, 1307(충렬왕33) 판위위시사·권수밀직부사가 되어 積弊(적폐)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됨으로써 政堂文學(정당문학)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림학사·시우산기상시, 이어 좌승지·비서윤·지병조사·사림학사가 되었으며, 뒤에 商議會議都監事(상의회의도감사)를 거쳐 贊成事(찬성사)에 올랐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檢校僉議政丞(검교첨의정승)이 되어 臨海君(임해군)에 봉해졌으며, 1315(충숙왕 2) 科擧(과거)를 맡아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諸子百家(제자백가)에 통하고 詩文(시문)에 뛰어났다. 忠州(충주) 道統祠(도통사) 配享(배향)되었다.
 
4)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3)~ 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문신·시인.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본관은 경주

정면 4,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홑치마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