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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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숭현서원(崇賢書院)
   대전광역시 유성구 완촌동 산35
   김 정(金 淨) 정광필(鄭光弼) 송인수(宋麟壽) 김장생(金長生) 이시직(李時稷)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송시영(宋時榮)
   16세기 후반
    1609년(광해군 1)
   음력 3월, 9월 중정일(中丁日)
   대전광역시기념물 제27호(1992.07.22지정)
원촌동은 보통 

1)주벽-김정(金淨, 1486∼152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 출신. 호(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처용(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윤공(尹恭)의 딸이다.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 :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緖)·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천부(天富)·천우(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제주풍토록>은 그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2)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구령(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목사 사(賜)이고,아버지는 이조판서 난종(蘭宗)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이지지(李知止)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른 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 구제에 공헌하였다.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 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이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하자, 신용개(申用漑)가 선비가 대신을 면대해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해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바른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1년 70세에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있을 때,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를 받아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부마가 되어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한 일로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1)숭현서원비
신흠(申欽)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현재의 비는 숭현서원의 이력을 적은 비로 2001년 모사해둔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