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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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무양서원(武陽書院)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535-1
   최사전(崔思全) 최윤덕(崔允德, 최 부(崔 溥) 유희춘(柳希春) 나덕헌(羅德憲)
   일제강점기
   
   
   광주문화재 자료 제 3호(지정:1984. 2.29)
1984년 2월 29일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인종 때의 어의 장경공 최사전(崔思全)을 주벽으로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孫菴 崔允德), 금남 최부(錦南 崔溥)와 문절공 유희춘(柳希春), 충렬공 나덕헌(羅德憲) 등 다섯 명을 배향한 서원이다. 1927년 탐진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웠으며 광주의 옛이름 '무진의 볕' 즉 무진지양(武珍之陽)에서 이름을 따 지었다.매년 음력 9월 6일 제향하고 있다.

1)최사전(崔思全, 1067~1139)
자 휼세(恤世). 시호 장경(莊景). 내의(內醫)로서 예종의 등에 난 부스럼을 가볍게 보고 치료하지 않은 죄로 2년 도형(徒刑)을 받았다.소부소감(小府少監) ·군기소감(軍器少監)을 거쳐 1126년(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남용하자 인종과 협의, 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복, 그로 하여금 자겸을 제거케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 ·지도성사(知都省事)로서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가 더해졌고, 삼한후벽상곡신(三韓後壁上功臣), 뒤에 수태위(守太尉) ·주국(柱國)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2)최윤덕(崔潤德, 1376~1445)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운해(雲海)이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올라 1396년(태조 5) 아버지를 따라 영해(寧海)의 반포(磻浦)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등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1400년(정종 2) 태종이 불러 특별히 훈련관부사직에 임명했으며, 1402년(태종 2)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었으며,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면서 동북면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가 되었다.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어,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로 나가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킴으로써 여진족의 준동을 막았다. 1415년 영길도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가 되었고, 우군총제·중군도총제를 거쳐 1419년(세종 1)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병선 227척, 군사 1만 7,000여 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對馬島]을 정벌했다(→ 쓰시마 정벌). 1421년에는 공조판서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23년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여진족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하자 다시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황해도·평안도의 군사 1만 5,000여 명을 동원해 이를 정벌하고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했다. 그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다시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진압했으며, 돌아와서는 소를 올려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며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야인정벌). 1435년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영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통천 상렬사(尙烈祠)와 안주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3)최부( 崔溥, 1454~1504)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아버지는 진사 택(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김굉필(金宏弼)·신종호(申從濩) 등과 교유했다. 1482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저작·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했다.
최부는 1485년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여 논(論) 120편을 집필했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87년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다. 최부는 다음해 1월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나주로 돌아오던 중 초란도(草蘭島)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한 끝에 명나라의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했다. 왜구로 오인되어 살해될 뻔했으나 야음을 틈타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베이징[北京]으로 호송되었다가 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성종의 명을 받아 그동안의 견문을 일기 형식의 〈금남표해록 錦南漂海錄〉 3권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왕명이라 하더라도 부친상을 당한 몸으로 귀국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지체한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헌부의 탄핵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뒤 지평·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논란이 일어 승문원교리로 밀려났다. 최부는 연산군대에 일찍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의 제작 및 이용법을 보급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최부는 1498년(연산군 4) 7월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하인 이종준(李宗準)·이구(李龜)·김굉필·박한주(朴漢柱) 등과 함께 붕당(朋黨)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했다는 죄명으로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당했다. 〈금남표해록〉은 국내에서 한문·한글본으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도 〈당토행정기 唐土行程記〉·〈통속표해록〉 등으로 간행되었다.
 
4)유희춘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출신.
계린(桂麟)의 아들이며, 부인은 여류문인인 송덕봉(宋德奉)이다.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김안국(金安國)·최두산(崔斗山)의 문인으로서,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그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강당인 이택당(以澤堂)의 좌우에 합의문과 일반적인 통용문으로 사용되는 합인문이 있다. 문 안에는 오른쪽에 성지재(誠之齋)와 왼쪽에 낙호재(樂乎齋)가 있으며, 높은 대지 위에 무양사(武陽詞)가 있다. 앞쪽의 삼오문 좌우측 문짝 위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이다.
 
탐진최씨 문중에서는 서원의 교육기능을 살려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량중학교(현 비아중학교)를 설립하였다.



무양서원과 최부의 표해록
 
김종직 문하이자 송흠과의 일화는 청렴성 표본
부친상 위해 귀향선 타던 중 폭풍우 만나 중국행
6개월 8천리 고행길 일기체로 기록한 기행서 집필

조선 성종 19년(1488년) 정월 그믐 날, 제주도에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던 조정의 관료 한 사람이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전라도 나주로 초상을 치르러 가기 위하여 급히 배를 띄웠다. 그런데 군관, 향리, 관노 등 모두 43명이 탄 배는 추자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났다. 10여일을 강풍과 폭우 속에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강남의 절강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였다.

살았다고 환호를 한 순간 고난이 또 닥쳐왔다. 왜구로 몰린 것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황에서 고급 관료가 필담으로 조선의 역사와 인물, 예의범절 등 여러 이야기를 잘하여 그들은 혐의를 벗는다.

그리고 중국 관리와 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른다. 북경에서 그들은 황제를 알현한다. 부친상을 당한 관료는 황제 알현 시에도 상복을 고집하여 명나라 측과 실랑이가 벌어진다.

결국 이 일은 알현 시에만 잠시 예복을 입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이후 이들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귀환한다. 제주도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8천 여리의 험난한 길을 돌아온 것이다.

성종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총책임자인 고급관료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동안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8일 동안에 써서 임금에게 바쳤다.

이 책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고 그 저자는 최부(단종 2년 1454- 연산군 10년 1504)였다.

금남 최부. 그는 나주에서 태어나 해남 정씨와 결혼하여 처가인 해남에서도 살았다. 그의 호 금남(錦南)도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錦)과 해남의 남(南)을 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림의 종주(宗主)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를 한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였다.

그의 청렴성은 그와 지지당 송흠(1459-1547)과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최부와 송흠은 홍문관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고향도 같은 전라도라 가깝게 지내는 터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고향으로 휴가를 갔는데, 하루는 영광 삼계(지금은 장성군)에 사는 송흠이 해남에 있는 최부의 집을 찾아왔다.

점심 겸상을 물린 뒤 최부가 송흠에게 느닷없이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부는 역마는 한양에서 고향집에 올 때까지만 탈 수 있는데 어찌 사사로운 일에 쓰느냐고 질책을 하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최부의 질책에 당황한 송흠은 몹시 부끄러웠다. 그는 영광의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역마를 끌고 걸어서 갔다.

휴가가 끝나고 얼마 뒤 홍문관을 떠나게 된 송흠은 최부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최부는 “자네는 나이가 젊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라며 타일렀다. (일설에는 최부는 상경하여 송흠을 탄핵하였다고 한다)

최부는 너무나 대쪽 같은 선비였다. 사리사욕과 방탕 그리고 무사안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강직한 간관(諫官)이었다. 그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폭군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3월, 사간원 사간(종3품)인 그가 올린 이 상소는 너무나 격렬하여 다음 달에 그가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갈 때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간의 직함을 회수하여 버렸다.

다음 해(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조의제문 사건의 주역인 김종직이 총애하는 제자이면서 이미 연산군 눈 밖에 난 그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붕당을 하였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갔다.

그로부터 6년 뒤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또 끌려 왔다. 곤장 100대에 노비가 되어 거제도로 유배 가는 것으로 되었으나 연산군은 그리하지 않았다. 참형(斬刑)을 명한 것이다. 이 때 썼으리라는 시가 전해진다.

북풍이 다시 세차게 부는데
남녘 길은 어찌 이렇게 멀까.
매화는 차갑게 잔설을 이고
말라버린 연꽃 가지 작은 못 속에 있네.

北風吹更急 북풍취경급
南國路何長 남국로하장
梅冷封殘雪 매냉봉잔설
荷枯立小塘 하고입소당

참형의 어명이 내려진 날. 그 날의 '연산군일기'에는 그에 대한 졸기(卒記)가 이렇게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1504년) 10월25일.
광주시 광산구 첨단의 산월초등학교 근처에 무양서원(武陽書院)이 있다. 여기에 최부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그의 외손자 유희춘도 함께 배향되어 있는데 '미암일기'의 저자이기도 한 유희춘은 외할아버지 최부의 글을 모아 '금남집'을 엮었고 선조 2년(1569년)에 다시 간행된 '표해록'의 발문을 썼다.
'(전략) 많이 듣는 것을 구하고 사물을 잘 알고자 노력하는 선비 가운데 이 책을 보고자 하는 이가 많았다. (중략) 아! 이 책이 손상되고 불완전하여 매몰된 지 거의 백년이었는데 지금 오랜 어둠속에서 밖으로 드러나 세상에 널리 전해질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유희춘의 '표해록' 발문에서.

6월의 토요일 오후 무양서원에는 공부가 한창이다. 문화재청과 광산구청에서 함께 하는 '무양서원의 아해들' 강좌이다. 최부의 후손들인 호남인들이 유학의 중심 사상인 인(仁)과 의(義)를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로빈손크루소의 표류기' 보다 더 재미있고 문학적인 해양기행 책이고, 원나라 때 만들어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당나라 때 유학 온 일본승려 에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여행기로 해외에서 더 유명한 책인 '표해록' 이름을 들어 보았을까?
명나라 중기 중국의 정치와 사회, 도시와 문화, 생활풍습들을 자세히 묘사하여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높은 이 책을 읽어 보았을까? 더구나 '표해록' 책을 쓴 사람이 바로 무양서원에 신위가 배향되어 있는 호남의 강직한 선비 금남 최부임을 알까?

김세곤 (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