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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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암서원(雲岩書院)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송제민(宋齊民) 고경리(高敬履) 송 타(宋 柁) 권 필(權 韠) 신 필(申 鞸) 신한주(申漢柱)
   1706년(숙종 32)
   
   불향
   
운암서원(雲岩書院)은 1706년(숙종 32)에 도내 유림의 청원으로 운암산하 황계지상(黃溪之上)에 건립하여 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을 배향했고 1709년(숙종 35)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의 사촌 아우 창랑 고경리(滄浪 高敬履), 화암 송타(花岩 宋柁), 석주 권필(石州 權韠) 등을 추배했다. 그 뒤 정우 신필(靜友 申鞸), 도계 신한주(道溪 申漢柱) 등을 추배했다. 이 운암서원(雲巖祠라고도 함)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고 그 위치에 운암서원유허비를 세웠다. 그리고 최근에 영모재가 있던 자리에 운암서원을 새로 짓고 그 내부에 영모재와 운암서원 유허비를 들여놓았다.

1)송제민(宋齊民, 1549∼1602)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신평(新平).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 현감 기손(麒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구(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정황(庭篁)이다.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호방한 성격에 구속을 싫어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梁山龍)·양산숙(梁山璹)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다시 김덕령(金德齡)의 의병군에 가담하였다. 김덕령이 옥사하자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 臥薪記事≫를 저술하였다. 또,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으나 이것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되어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1789년(정조 13)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광유고≫가 있다.
 
2)고경리(高敬履, 1559∼1609)
조선 중기의 유생.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척(而惕), 호는 창랑(滄浪). 아버지는 진사 계영(季英)이고, 어머니는 양응기(梁應箕)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집권한 대북세력이 서인학통을 공격하자 최영경(崔永慶)을 죽이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경에 빠져 있던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에서 선현으로 이름 높은 이언적(李彦迪)을 제외하였다는 이유로 대북세력에 의하여 상소는 불태워지고, 사림의 구호에도 불구하고 종신금고에 처해졌다.
1676년 광주(光州)에 건립된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
 
3)송타(宋柁, 1567~1597)
송제민(宋齊民)의 아들이며, 고경명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정유재란 당시 왜적에게 붙잡혔을 때 의병활동과 송제민의 아들이란 사실이 탄로나 일본으로 압송돼 가던 중 한산도 앞 바다에 이르러 왜적의 칼을 빼앗아 배 안에 있던 왜적을 모조리 베어 죽였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이 창을 맞고 달아났다가 원병을 이끌고 돌아와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자 송타는 “나는 송제민의 아들인데 후일 너희들이 귀국하면 부모님께 내 소식을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이 같은 사실은 함께 붙잡혀 갔던 창평의 진사 이신(李紳)이 강항(姜沆 1567~1618)에게 전해 송타의 매제인 석주(石洲) 권필(1569~1612)의 ‘명행기(名行記)’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4)권필(權韠, 1569~1612)
본관 안동. 자 여장(汝章). 호 석주(石洲). 정철(鄭澈)의 문인. 과거에 뜻이 없어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강화부(江華府)에 갔을 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모아 가르쳤고, 이정구(李廷龜)가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使臣) 고천준(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文士)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이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 때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고, 광해군 초에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교제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광해군 비(妃) 유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궁류시(宮柳詩)로써 비방하자, 광해군이 대로(大怒)하여 시(詩)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의 시가 발견되어 친국(親鞫) 받은 뒤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현전한다.
 
5)신필(靜友 申鞸)
호는 정우(靜友)이며, 광주 운암서원에 추배되었다.
 
6)신한주(申漢柱, 1696~1778)
호는 도계(道溪) 1721년(경종 1)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무관직을 역임한 후 전라도 감영 주군(州郡)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1769년(영조 45)에 전라남도 광주 운암서원(雲巖書院)에 석주(石州) 권필(權弼)과 함께 추배되었다.

1)영모재(永慕齊)
화암마을 입구 운암서원 內, 1933년, 영모재는 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을 배향한 재실로 화암마을 입구에 있는 운암서원(雲巖書院)내부에 있다. 송제민은 원래 운암동에 있었던 운암서원에 배향되었다가 사우의 훼철로 이곳으로 옮겼다.
건물은 막돌허튼층 쌓기의 자연석 기단 위에 다듬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의 한식 기와로 된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뒤편에는 2개의판문과 온돌방아래 함실아궁이를 내었다. 마루는 귀틀에의 한 툇마루와 좌우에 동바리를 받친 쪽마루를 두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대문은 소슬대문이며 담장은 붉은 벽돌로 쌓았다. 이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옛 건물을 헐고 재건하였다.
 
2)운암사(雲巖祠)
정면3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집이며, 내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3)기타
외삼문(崇義門), 장판각 및 비석1가 있다.

1)운암서원유허비(雲岩書院遺墟碑)
이 운암서원(雲巖祠라고도 함)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철폐되었고 그 위치에 운암서원유허비를 세웠다. 그리고 최근에 영모재가 있던 자리에 운암서원을 새로 짓고 그 내부에 영모재와 운암서원 유허비를 들여놓았다. 이 비는 1706년에 세워졌으며, 26자 8행의 비문이 있고 비각을 갖추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4cm, 폭 45cm, 두께 13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