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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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잠곡서원(潛谷書院)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140-17
   김 육(金 堉)
   1705년(숙종 31)
   1707년(숙종 33)
   음력 3월
   가평군향토유적 제7호(1986.06.19지정)
잠곡서원은 김육(金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으로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본 서원이 있었던 자리는 김육이 잠곡(潛谷)에 은거하면서 학동을 가르치던 곳이라 한다. 1705년(숙종 31)에 창건되어 김육을 단독 배향하였으며, 1707년(숙종 33)에 사액되었다. 그러나 1870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고, 위패는 서원 터에 매안하였다. 그 뒤 가평유림들이 제단을 만들어 향사를 지내오던 중 한국전쟁 때 폐허화 되었다. 1983년에 가평군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서원 터에 위패석(位牌石)과 잠곡선생김육추모비를 세웠으며 음력 3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김육(金堉, 1580∼1658)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식(湜)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비(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흥우(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이때부터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하였다.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10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633년 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1636-1637년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예조참의·우부승지·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 : 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 救荒撮要≫와≪벽온방 辟瘟方≫ 등을 편찬, 간행한 후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형조참의 겸 대사성·대제학·대사간·병조참의·한성부우윤·도승지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병조참판·이조참판 겸 비변사유사제조(備邊司有司提調)·형조판서 겸 선혜청제조·우참찬·대사헌·예조판서·도총부도총관·개성부유수 등의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1643년과 1645년)나 더 다녀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 類苑叢寶≫·≪황명기략皇明紀略≫·≪종덕신편 種德新編≫·≪송도지 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이듬 해 1월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하였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하였다.그리고 12월에는 원임(原任)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으로 지내면서도 대동법 시행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한편, ≪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을 저술하고 ≪인조실록≫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을 작성하여,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작고하여,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 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 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 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潛谷續稿≫가 전한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 天聖日錄≫·≪청풍세고 淸風世稿≫·≪조천일기 朝天日記≫·≪기묘록 己卯錄≫·≪잠곡필담 潛谷筆談≫·≪당삼대가시집 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 <자네집에 술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는 우리 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번역 출판중임. 총 14권으로 발간 예정이며 현재 제1권 제2권이 발간되었음.)으로 주목된다. 그리고 ≪구황촬요≫·≪벽온방≫·≪종덕신편≫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서, 그의 위민적(爲民的) 생애의 단면을 보이는 저술이다. 그는 이와 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업은 그의 자손 대(아드님 佐明: 三鑄甲寅字, 손자 錫冑: 韓構字)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 나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있다. 가평(加平)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 황강서원(凰岡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고,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홀로 제향되었다.시호는 문정(文貞)이다.


潛谷遺稿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일찍이 서적의 편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芝山集」이나 「月汀集」, 「牛溪集」, 「體素集」 등의 간행을 주관하였는데 본인의 저술도 생전에 간행된 것이 많다. 저자의 아들 金佐明이 지은 家狀에 의하면, “先君이 지은 詩文은 미처 원고를 거두지 못하기도 하고 병화에 잃은 것도 있는데 남은 詩文은 대략 10책으로 모두 만년에 지은 것이다. 燕京에서 文天祥의 유적을 생각하여 集杜詩를 지었는데 그 뒤 瀋陽에 갔을 때나 開城 留守로 있을 때, 또 田野로 돌아가 있을 때도 계속 지어 모두 300여 수가 있다. 또 일찍이 지은 「皇明紀略」6권, 「類苑叢寶」40권, 「種德新編」3권, 「海東名臣錄」9권, 「己卯錄」1권, 「松都誌」1권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攷事增刪」, 「潛谷筆譚」각 1권이 家藏되어 있다.”라 하여 편찬서 외에 詩文 10책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실록에 의하면 1668년(현종 9) 8월, 金佐明이 守禦廳의 수어사로 있으면서 銅鐵로 活字를 주조하고 그 工匠의 급료와 役價를 청하였으므로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때에 주조된 활자가 戊申字로서 大字 6만 6100자, 小字 4만 6600자였으며 김좌명이 1671년 3월에 졸하고 다음 해인 1672년에는 활자가 교서관으로 이관되었다. 따라서 1670년(현종 11)경 김좌명의 생존시에 위의 家藏 草稿를 편차하여 印行한 것으로 보인다.《초간본, 戊申字本》 이때 潛谷遺稿 11권과 別稿 1권, 補遺 1권, 年譜 1권 합 10책을 함께 印行하였다.초간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1~2는 270여 편의 시를 詩體別로 분류하고 각 체 내에서 다시 연대순으로 편차한 詩와 集杜詩이고, 권3~6은 疏箚(65), 啓辭(39), 收議(18), 書狀(16), 呈文(6) 등인데, 역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7은 記, 序, 跋, 說 등이고, 권8은 賦, 上樑文, 祭文 등이다. 권9는 應製錄으로 哀冊文과 敎書, 致祭文이고, 권10~11은 行狀, 神道碑銘 등의 묘도문자이다. 別稿는 表箋(7), 賦(8), 策問이고, 補遺는 태학생 때 올린 〈請從祀五賢疏〉를 비롯한 疏箚 13편과 天聖日錄, 策題, 詩 20편이다. 序跋은 없다. 이 戊申字本은 현재 규장각(奎1782, 4891), 장서각(4-6437),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연대소장본에는 “淸風世家 金佐明印”이란 印記가 있어 간행 주체를 밝혀주고 있다.그 후 金佐明의 아들 金錫胄가 肅宗 초에 韓構字를 鑄造하고 1683년(숙종 9)경 초간본을 14권 7책으로 재편집해서 이 활자로 인행하였다.《중간본, 韓構字本》 중간본은 초간본의 補遺와 別稿 부분을 原集의 각 문체내에 연대순으로 편차해 넣고 朝京日錄을 덧붙여 간행한 것이다. 본집의 권두에 실려 있는 尹新之의 글은 1647년에 쓴 朝京日錄에 대한 서문이다. 韓構字本은 규장각(古3428-885), 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3648-文10-73), 성암문고(4-912) 등에 零本이 있고,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602)에 완질본이 있다.또한 규장각(奎4880)에 「潛谷碑誌」라는 제명으로 李景奭이 지은 저자의 神道碑銘, 趙絅이 지은 墓誌銘, 李敏求가 지은 行狀과 湖西宣惠碑銘이 수록된 활자본이 있는데, 序跋이 없어 편자와 간년은 자세히 알 수 없다.이 외에 최근 1975년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潛谷全集」이란 제명으로 잠곡유고 초간본과 後孫家에 필사본으로 家藏되어 있던 潛谷續稿, 潛谷筆譚, 種德新編, 年譜와 家狀, 世乘 등을 영인하여 출판하였다.본서의 저본은 1683년경 韓構字로 인행한 중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기사전거 : 家狀(金佐明 撰, 潛谷全集), 韓國古印刷技術史(金斗鍾 著)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14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 첫머리에 目錄이 실려 있다. 卷頭에는 朝京日錄에 대한 尹新之의 서문이 목판으로 판각되어 실려 있다.권1~2는 詩와 賦이다. 賦 4편 중 1636년에 지은 〈登海嶠賦〉는 尹新之가 楚辭에 가깝다고 극찬하였다. 詩는 오언고시(45), 칠언고시(8), 오언율시(68), 칠언율시(34), 오언절구(33), 육언절구(2), 칠언절구(115) 등 총 310여 편으로 각 체 내에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분량은 초간본에 비해 40여 수가 증가하였다. 시기적으로는 주로 후기 작품이 많은 편이다. 내용은 〈敬次晦菴先生感興詩韻〉 16수, 〈次陳子昻感遇詩韻〉 11수와 같이 古人의 운에 차운한 시가 있고, 저자가 네 번이나 中國을 왕래하였으므로 燕京을 오가는 도중의 풍물과 감상을 읊은 시가 많다. 또 오언배율과 칠언절구 중에는 李廷龜, 張維, 李敬輿, 金萬烋 등에 대한 挽詩 27편이 실려 있다. 저자의 시는 情景을 그려내는 데 뛰어나고 자연스러우며 五七律 長篇은 기력이 渾厚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권3은 集杜詩로 특이한 詩體인데, 권말에 潛谷筆譚에 실린 集句體에 대한 글을 재수록하여 집구체의 유래와 우리나라의 集句詩, 그리고 저자가 集杜詩를 쓰게 된 연유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使行 길에 丙子胡亂의 소식을 듣고 비분하던 중 文天祥의 集杜詩를 보고 감명을 받아 자신도 200여 수를 文山體로 지어 보았다고 설명하였다. 각 구절마다 杜甫의 原詩 제목을 달아놓았다.권4~6은 疏箚이다. 이 부분은 일생을 大同法 시행에 바친 經世家로서의 저자의 사상과 정책을 살필 수 있는 주요 자료로서 소차의 제목만 일별하더라도 흔히 나오는 辭職疏보다는 정책 건의에 대한 차자가 많음을 알 수 있다. 1609년 태학생으로서 올린 〈請從祀五賢疏〉를 비롯하여 1658년에 올린 遺箚까지 총 78편이 실려 있다. 우의정이 되어 본격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던 1649년 이후의 차자가 많은데, 이 중 권5의 1650년(효종 1) 올린 일련의 사직소는 大同法 실시를 반대한 金集과의 불화로 인해 올린 것이다. 당시 정계는 같은 西人이라도 大同法의 실시를 둘러싸고 찬성하는 漢黨(金堉, 申冕)과 사대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山林인 山黨(金集, 宋時烈, 李惟泰)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권6의 〈病劇進言以終遺意箚〉는 湖南의 대동법 실시를 위해 徐必遠을 추천하는 내용인데, 죽기 직전에 올린 것으로 대동법에 대한 저자의 신념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錢貨의 유통과 私鑄錢의 허용을 주장한 〈請令湖西山邑鑄錢箚〉, 〈畿甸收米再請代錢啓〉, 〈請令戶兵曹同議行錢事箚〉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水車를 사용한 灌漑法, 수레의 사용 등 새로운 정책을 주장한 내용이 많다.권7은 啓辭 47편이다. 이 중 〈論曆法啓辭〉는 1644년 관상감 제조로 있으면서 時憲曆의 시행을 청한 내용이고, 1649년에 올린 〈禮曹啓辭〉 9편은 仁祖의 昇遐와 孝宗의 즉위시 山陵과 儀節에 관한 계사이다.권8은 獻議 18편과 書狀, 呈文이다. 壬辰亂과 丙子亂에 죽은 충신 효자를 포증하는 논의부터 당시 濫設이 문제시되던 書院의 개혁, 麟坪大君의 喪에 대한 親臨致祭 등이 논의되었다. 書狀은 1638년 충청도 관찰사 때 올린 것부터 1648년 개성 유수 재임 시 올린 〈加設訓導…〉까지 모두 16편이다. 呈文 4편은 모두 중국의 禮部와 提督 등에게 올린 글이다.권9는 書(2), 序(13), 記(4), 跋(7), 雜著(2), 上樑文(4), 祭文(19), 哀辭(1)이다. 저자는 서적의 편찬과 간행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楓巖集跋〉, 〈體素集跋〉, 〈新印神應經跋〉, 〈種德新編序〉 등 직접 간행한 서적의 序跋이 많이 실려 있다. 또 이러한 경향이 후손인 金佐明, 金錫胄까지 내려와 戊申字와 韓構字를 주조해 문집을 인행하는 등 당시 서적의 출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湖西大同節目序〉에서는 군자가 학문을 하고 벼슬을 하는 것은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기 위해서라는 신념 아래 온갖 비방과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 湖西에 행한다는 저자의 결의가 담겨 있다. 記文 중 〈在山樓記〉는 저자가 77세가 되던 1656년에 지은 것인데 南山에 지어진 누각의 기문이다. 在山樓는 선비들이 모여 강습하던 장소로서 상당한 양의 서적도 소장되어 있었던 듯하다. 祭文은 동생 金埥, 閔聖徵, 金尙憲 및 休菴書院, 平山書院, 表忠祠의 祠宇와 海神, 土地神에 대한 제문 등 다양하게 실려 있고, 애사는 麟坪大君에 대한 것이다.권10은 昭顯世子의 哀冊文을 비롯하여 不允批答 3편, 敎書 4편, 致祭文 9편, 策問 등의 應製文과 擬題인 表箋 7편이 실려 있다.권11~13은 行狀, 墓碣銘 등의 묘도문자이다. 저자의 스승인 芝山 曺好益의 行狀과 閔聖徽, 金權, 李尙吉, 元豪의 諡狀, 麟坪大君과 金瑬의 묘지명, 金靜厚, 朴應寅, 李海壽의 묘갈명 등이 실려 있다. 권13은 閔箕, 白仁傑, 南銑, 李舜臣의 신도비명과 成渾의 妻인 高靈申氏의 墓碣陰記가 실려 있다.권14는 1607년 天磨山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天聖日錄〉과 冬至使로 중국에 다녀온 1636년 6월부터 1637년 6월까지의 기록을 담은 〈朝京日錄〉이다. 〈朝京日錄〉 중에는 오가는 旅路와 함께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뇌물을 요구하는 明 관리의 행패와 탐오한 풍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병중에 胡亂 소식을 듣고 통탄해하는 저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권말에는 1638년에 申翊聖이 쓴 朝天錄後識가 문집 발문을 대신해 실려 있다.


구조물
가로 15m, 세로12m의 담장을 둘러 보호시설을 만들고 앞쪽에는 안이 들여다보이도록 철책을 가설하였으며 정면 중앙에 “잠곡김선생신위(潛谷金先生神位)”라고 새긴 제단위비(祭壇位碑)가 서 있고, 우측으로 1981년에 세운 “잠곡선생김육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잠곡선생김육추모비건립성급찬조자방명기」를 기념비로 세웠다. 원래의 자리를 잃은 주춧돌 6개가 양쪽 담장 밑에 놓여있다.옛터는 원상을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파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