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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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문봉서원(文峯書院)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603-3
   민 순(閔 純) 남효온(南孝溫) 김정국(金正國) 기 준(奇 遵) 정지운(鄭之雲) 홍리상(洪履祥) 이신의(李愼儀) 이유겸(李有謙)
   1688년(숙종 14)
   1709년(숙종 35)
   
   
문봉서원은 1688년(숙종 14)에 건립되었고, 그 후 21년 뒤인 1709년(숙종 35)에 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건립연대로 보면 행주서원보다 약 150여년 정도 빠르고 고양향교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고양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1871년(고종 8)에 이르러 폐쇄되었으며, 현재는 문봉서원이 헐리고 난 빈터만 있다.

1)주벽-민순(閔純, 1519∼159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습정(習靜).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郎) 학수(鶴壽)이다. 어려서는 신광한(申光漢)의 문하에서, 장성한 뒤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경덕으로부터 주정(主靜)의 설(說)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자기가 처하던 재(齋)의 이름을 ‘습정(習靜)’이라 하였다 한다. 1568년(선조 1) 효행으로 천거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학행이 알려져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되었다. 이어 공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토산현감(兎山縣監)으로 나갔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고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심하였다.
1575년 사헌부지평으로 다시 조정에 들었으나, 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을 당하여 예관(禮官)들이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상복을 정하자, 그는 송나라 효종(孝宗)의 백모3년(白帽三年)의 고제(古制)로 고쳐 준용할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물의를 빚어, 그해 6월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초야에 묻혔다.
그 뒤 용강현령(龍岡縣令)·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내고 사헌부장령을 거쳐 수안군수(遂安郡守)에 이르렀으나, 모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는 하였다. 그 뒤로는 연안(延安)·성천(成川)의 부사(府使)·공조정랑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홍가신(洪可臣)·한백겸(韓百謙)·홍치상(洪致祥)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행촌집≫이 있다.
 
2)남효온 (南孝溫, 1454∼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俊)이고, 아버지는 생원 전(恮)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지 아니하였다.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한다. 주계정(朱溪正)·이심원(李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 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식이 높은 선비)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 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그를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하였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그가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간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로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