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상위(西上位)-박서 (朴犀, 생몰년 미상)
자는 양종(洋宗), 호는 죽계(竹溪),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고 음성백(陰城伯)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12세손으로 고려 고종 18년(서기 1231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재임 중, 몽고병의 침략에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전공을 세워 나라의 國格과 位相을 크게 선양하였다. 이로써 그는 겨레의 사표(師表)가 되고, 그의 행적은 우리나라 역사 만대(萬代)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일어나 세계를 제패한 몽고는 징기스칸의 아들 태종이 만주 여진의 金나라를 치기위해 친정할 때, 부하 장수 살리타이에게 고려를 장악토록 명령하였다. 철주(鐵州)를 침략하고 구주(龜州)를 기습하자, 김중온·김경손 장군등과 함께 구주에 모여 성을 사수(死守)하며 항전(抗戰)하였다. 몽고군은 2중 3중으로 성을 포위하고, 누거(樓車)·대포차(大砲車)·운제(雲梯) 등 온갖 무기를 동원하고 땅굴을 파는 등 한 달 동안 갖은 전술과 계책을 다해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바로 개성으로 진격하여 함락하고, 고종의 항복을 받고 나서 다시 구주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종은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거부하다가 왕명(王命)을 어기지 못하여 드디어 항복하고 고향 죽주(竹州)로 돌아갔다. 나이 70여세의 몽고 장군 한 사람이 성의 안팎과 무기를 둘러보고 개탄하기를 "일평생 많은 전쟁을 겪었으나, 이렇게 호된 공격에도 항복치 않은 것은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무신정권은 화의를 맺고 몽고군은 철수하기에 이르니 즉 역사상 몽고의 제 1차 침입이었다. 이로부터 근 1세기에 걸치는 저 피맺힌 항쟁의 대결에서 고려는 비록 전쟁에는 졌으나, 당시 세계 아시아 유럽을 휩쓴 천하무적 몽고 기병의 명예를 여지없이 깨뜨린 기적 같은 전투승리의 기록을 우리나라와 세계역사에 남긴 이가 바로 충정공이었다.
항전 사수하였던 구성(龜城)에 기공비(紀功碑)가 건립되었으며, 숙종년간 단암 민진원의 계청으로 장졸들을 훈련하던 곳에 정공사(旌功祠)가 세워지고 사액(賜額)되었다.
2) 중앙위(中央位) - 박순(朴淳, ? ~ 1402)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신(名臣).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44세손으로 고려 명장(名將) 충정공 박서의 현손이다. 서기 1388년(고려 우왕14년) 요동 정벌 때 도평의사사지인(都評議使司知印)으로 이성계 휘하에 종군하여 위화도 회군(回軍)에 앞서 그 승인을 얻기 위해 우왕에게 파견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공신으로 이조판서, 상장군의 관직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태조가 여러 왕자를 죽이고 즉위한 태종을 미워하여 함흥으로 가 머물러 있자, 태종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태조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파견된 문안사(問安使)는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이 때 박순이 자원하여, 하인도 없이 망아지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으로 갔다. 태조가 있는 곳에 이르러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 메어놓고 어미 말만 타고 가니 어미 말이 가지 않으려 하였다. 태조가 이상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새끼 말이 길 가는데 방해가 되어 떼어 놓았더니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합니다. 비록 짐승일망정 지친(至親)의 정(情)이 있는 모양입니다."하고 풍간(諷諫)하니 태조가 슬퍼하였다.또 함흥 행조(行朝)에 체류하던 어느 날 태조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데, 마침 쥐가 새끼를 껴안고 추녀에서 땅에 떨어져 죽을 지경이었는데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때 그는 바둑판을 옆으로 치우고 엎드려 눈물로써 태조의 귀환을 간청하였다. 이에 태조는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였다. 귀로에 오르자 측근들의 살해해야한다는 요청에, 용흥강(龍興江)을 건너갔으리라 짐작하여 강을 건넜으면 쫓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급한 병으로 지체하다가 간신히 배에 올랐는데 결국 피살되었다. 이에 저 ‘半在江中半在船’의 해동악부(海東樂府)의 반강선사(半江船詞)를 남기게 되었으며, 마침내 태조는 한양으로 귀환하였다.
태종은 그를 공신으로 봉하고 화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에 추증하고 노비 및 토지를 하사하였다. 또한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제사하게 하고 자손을 등용케 하였다.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열녀 정경부인 장흥 임씨에게는 묘지를 하사하고 충신·열녀의 쌍정문(雙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노봉 민정중이 충민공의 시장(諡狀)을, 연천 홍석주가 용강서원 청액소(請額疏)를 지었다.
조선 왕조 개국의 초창기에 태조와 태종이 양분되어 참으로 국가 존망(存亡)의 위기에 그의 간쟁(諫諍)과 순절(殉節)로 양 왕을 감동․화합케 함으로써 국시(國是) 유교의 근간인 군신(君臣)의 의리와 부자(父子)의 천륜을 온전히 회복케 하여 국기(國基)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과 행적은 겨레의 사표(師表)가 되고 우리나라 역사 만대의 귀감이 되었다.
3) 동하위(東下位) - 조상경 (趙尙絅, 1681~1746)
조선후기 문신. 자는 자장(子章), 호는 학당(鶴塘), 본관은 풍양(豐壤). 충민공의 외예(外裔)로서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의 문인이다. 시호는 경헌(景獻).
1710년(숙종 36년) 문과 급제. 경종년간 신임사화로 귀양. 영조 즉위 후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문교를 크게 일으키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지고, 재임 중 용강서원을 중건하고 성력(誠力)을 다 하였다. 이 후 정호·민진원을 변호하다 파직되고, 다시 대사간으로 기용되어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주청하였으며, 1731년 사은겸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로 가서 조선왕실 선계(先系)의 잘못을 바로 밝혀 ≪명사조선열전(明史朝鮮列傳)≫을 가지고 돌아왔다. 병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한성부판윤·판돈녕부사에 이르러 죽었다. 구한말 조대비(趙大妃)와 풍양조씨 세도가문의 직계 선조이다.
돌아간 후 함경도 사림(士林)이 용강서원에 추배(追配)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