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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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주서원(龍洲書院)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291
   백인걸(白仁傑) 김 행(金 行) 조 감(趙 堪) 신제현(愼齊賢) 백유함(白惟咸)
   1787년(정조 11)
   
   음력 9월 9일
   파주시향토유적 제1호(1986.04.17지정)
용주서원은 선조 때 학자이며 문신인 백인걸(白仁傑)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창건되었다.
1598년(선조 31) 당시에 백인걸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은거했던 옛 집터에 창건되었다.

1)주벽-백인걸(白仁傑, 1497∼1579)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庵). 서울에 거주하였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효삼(效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교(參校) 사수(思粹)이고, 아버지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익견(益堅)이다. 어머니는 사직(司直) 우종은(禹從殷)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김안국(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宋麟壽)·유희춘(柳希春)·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김식(金湜)이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求道)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해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해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 때 예문관 관리가 이조(吏曹)의 인사 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던 옛 관습을 복구해 실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는데 이 때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에는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수찬·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추천 기록)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같은 해 명종 즉위 뒤 윤원형(尹元衡) 등이 대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제거할 때,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으면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鄭順朋)·최보한(崔輔漢)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그 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李芑) 등의 농권을 비난하는 양재(良才)의 벽서를 기화로 소윤(小尹) 세력이 대윤(大尹)의 잔존 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 안변(安邊)에 유배당하였다. 1551년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뒤, ≪태극도설 太極圖說≫과 정주학(程朱學)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등용, 이듬해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치적 등을 쌓아 고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가 즉위한 뒤 1568년(선조 1) 기대승(奇大升)의 건의로 특별히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공조참의·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 밖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68년에는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오래지 않아 철렴(撤簾 : 수렴청정을 그만둠)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망할 때까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해 사림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李浚慶)의 의견을 좇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비들을 해하려 한다는 사림의 의심을 받아 1571년 파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우참찬으로 징소되었으나 치도(治道)를 논하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함께 다시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서인(西人)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 밖에도 국경의 상황을 논하고 군비를 닦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정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선조 초에는 많은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고 매우 연만해 많은 시간을 파주에 퇴거해 있었다. 이에 선조는 대사헌·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려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하고, 1569년의 경우와 같이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는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대한 탐구를 열심히 했으며 이이·성혼(成渾)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 기묘사화 뒤 명종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남평(南平)의 봉산서원(蓬山書院), 파주의 용주서원(龍洲書院)과 파산서원(坡山書院), 고창(高敞)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휴암집(休庵集)>이 있다. 인조 때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개시(改諡)되었다.
 
2)김행(金行, 1532∼158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長浦). 상(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사희(士熙)이고, 아버지는 국평(國枰)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극효(克孝)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행(金行)은 어려서 백인걸(白仁傑)과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수침은 성혼(成渾)의 아버지인데 그는 성혼과 동문수학하고 평생 형제처럼 지냈다. 벼슬은 내직으로 전적·형조좌랑·호조좌랑·예조정랑·한성부서윤·사성·사도시정(司䆃寺正)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무장현감·고양군수·서천군수·양주목사·광주목사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주로 외직에 머물고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필법이 호장활동하다는 평을 들었고, 1575년(선조 8)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증도가 證道歌>를 보완하여 간각(刊刻)했다. 또한, 무예와 지략에도 뛰어나서 1588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그를 천거하여 전라도병마절도사의 물망에 올랐으나 곧 죽었다. 이제신(李濟臣)과 친교가 두터웠다.
 
3)조감(趙堪, 1530∼158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월롱면 능산리에 묘가 있다. 자는 극기(克己), 호는 옥천(玉川),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다. 1566년(명종11)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살이를 끝낸 뒤 음보로 장수찰방에 임명되었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이번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다시 3년간 여묘생활을 하였다. 그 뒤 나이든 스승을 모시고자 함안(咸安)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왔다. 이후 사포서별좌를 거쳐 의금부도사와 평시서직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585년 종부시주부에 이르렀다.
조감(趙堪)은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며, 당대에 대문장가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또한 의리를 중히 여겼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가난한 이를 보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평온한 모습으로 유지를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파주의 용주서원에 배향되었다.
 
4)신제현(愼齊賢, 1532∼160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파주읍 봉암리에서 생장하였고, 그곳에 묘가 있다. 자는 사숙(思叔), 호는 낙금당(樂琴堂), 본관은 거창(居昌), 전력부위를 지낸 정(貞)의 아들이고 휴암 백인걸 (休菴 白仁傑)의 문하생이다.
1562년(명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여 제용봉사(濟用奉事)를 지냈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사건에 연루되어 이항복(李恒福), 윤두수(尹斗壽), 백유함(白惟咸) 등 38현이 유배될 때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최기용(崔起用) 등과 함께 금고되었다. 풀려난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도학상마(道學相磨)를 하였다. 학덕과 효행이 높아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5)백유함(白惟咸, 154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중열(仲說). 참교(參校) 사수(思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익견(益堅)이고, 아버지는 인걸(仁傑)이다. 어머니는 안찬(安璨)의 딸이다.
1570년(선조 3)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에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의 정자(正字)·박사·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3년에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당쟁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 : 현 익산시)의 농장에 내려가, 그 곳에 있는 백운암(白雲庵)에서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평정되자 다시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헌납이 된 후, 역적 정여립 등과 사귄 사헌부·사간원의 요직 인물들을 갈아치우도록 소를 올려 시행되었다. 다시 이조정랑을 거쳐 의정부의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했는데, 이후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흥으로 옮겨졌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의주로 왕을 호종(扈從)했으며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동분서주하면서 윤승훈(尹承勳)과 함께 군량미 2만석을 조달했고, 이어서 정주에서도 많은 군량미를 모았다.
그 해 10월에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 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 1594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 1596년에 우리나라의 실정을 설명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군(護軍)이 되어 명나라 사신인 정응태(丁應泰)를 접반하였다. 그런데 정응태는 접대가 소홀함을 난문하면서 조선이 한낱 왕국에 불과한데,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호(廟號)를 사용하는 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트집을 잡았다. 이에 대해 그는 조선왕의 묘호는 국초부터 당당히 사용해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 후 광해군 초에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양주로 방환(放還)되었다.

서원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월롱산의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경내 건축물로는 사당·내사문·강당·외삼문·홍살문이 있으며 사당의 왼쪽으로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강당은 1962년에 복원된 후 1997년에 개축되었으며, 정륜당(正倫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당의 안에는 정면에 백인걸(白仁傑)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왼쪽 벽에 김행(金行), 백유함(白惟咸)의 위패가, 오른쪽 벽에는 조감(趙堪), 신제현(愼齊賢)의 위패가 마주하여 봉안되어 있다.
1)백휴암선생유허비
서원이 철폐된 후 1862년에 본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2)문서·전적류
서원 관리사에 있는 사무실에 단자와 통문, 간찰, 방명록, 거안 등의 문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