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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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자운서원(紫雲書院)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이 이(李 珥) 김장생(金長生) 박세채(朴世采)
   1615년(광해군 7)
   1650년(효종 1)
   양력 10월 초순
   경기도기념물 제45호(1973.07.10지정)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경기도유형문화재 제77호(1978.11.10지정)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1615년(광해군 7)에 김장생 등이 주도하여 파주 호명산(虎鳴山) 아래에 창건. 그 후 자운산 아래로 이건하였고, 1650년(효종 1)에 사액되었다.
1695년에는 파주 유학(幼學) 정수하(鄭綏夏)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를 서원에 합향 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어 1713년(숙종 39)에 유생 조익주(曹翊周) 등이 김장생(金長生)의 추가배향과, 박세채(朴世采)의 합향을 배향으로 강등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후 영조·정조·순조 등 역대 임금이 자운서원에 치제하게 할 정도로 보살핌을 받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
서원 철폐 후에는 서원 터에 제단을 세워 제사를 이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뒤 자운서원은 1970년대 국난국복의 문화유적과 선현유적에 대한 보수·정화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복원되고 성역화 되었다. 1970년에 국가의 지원과 유림의 모금으로 사당을 복원한 데 이어 1973년에는 경내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화하였다. 서원에서는 음력 8월 중정일에 제향을 올렸으나, 최근에는 파주시 향토문화예술축제인 율곡문화제 개최를 알리는 추향제례로서 양력 10월 초순에 지내고 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최근의 것이고,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사당 앞 양쪽에 동서재 안쪽 옆으로 서 있는 두 그루 느티나무는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판을 보면 왼쪽, 오른쪽은 수령 380년이라고 되어 있으며, 둘 다 1982년에 지정되었다. 수령이 380년이 넘은 것이라면 아마도 이 서원이 건립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심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造營_자운서원은 광해군 7년(1615) 율곡 이이李珥(1536~1584)1 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김장생 등이 중심이 되어 파주 호명산虎鳴山아래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자운산 아래로 터를 옮겨 효종 1년(1650)에“자운紫雲”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숙종 30년(1713)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
(1631~1695)를추가배향한 후, 선현배향 및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2.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율곡을 모신 서원으로 황해도 백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이 지정됨으로써, 자운서원은 훼철되었고 그 위폐를 매안埋安하고, 서원 터에 단을 만들어 향사를 지내왔다. 이후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0년 사당이 있는 제향공간이 중건되었다. 이후 1972년 이이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을 기리기 위해 성역화 하였으며, 2000년 3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강인당, 동재, 서재 외삼문 일곽의 강학공간이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래 매년 음력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드렸으나, 1996년부터는 매년 가을에 개최되는 율곡문화제 때 제향을 지내고 있다.
 
2.자운서원은 파주의 파산서원과 합쳐 하나의 서원으로 새로 세울 계획이있었는바,1628년 자운서원과 파산서원을 함께 훼철하여 청송(聽松)성수침(成守琛,1493~1564),우계(牛溪)성혼(成渾,1535~1598),휴암(休庵)백인걸(白仁傑,1497~1579),율곡 이이 등을 함께 모시기 위해 서원을 천점(泉岾)으로 옮겨갔다.그러나 역사(役事)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못해 결국 파산서원은 계상(溪上)옛터로 다시 옮겼고,자운서원에는 양사(兩祠)를 건립에 동사(東祠)에는 율곡을 봉사하고,서사(西祠)에는 휴암을 봉사했다.그 후 휴암의 위패를 파산서원으로 옮겨감에 따라,율곡 묘 아래에 자운서원을 다시 지어 율곡을 모시게 되었다.
 
立地_자운서원은 호명산 자락의 완만한 구릉지에 전학후묘前學後廟식으로 정북에서 남측으로 향하여 배치되어 있으며3, 주변 일대는 야트막한 구릉으로 경관이 좋은 풍치림으로 조성되어 있다. 좌측 능선에는 이이와 양친의 묘소4가 위치하고 있으며, 근처에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설립한 율곡 교육원이 있다. 주변 환경으로는 화석정5, 파주향교, 파산서원, 용미리 석불입상, 파주삼릉, 소령원, 수길원등이 있다.
3.서원은 대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산수가 뛰어나고 조용한 산기슭이나 계곡 또는 향촌에 입지하였으며, 성격에 따라 절터 또는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였다.

1)이이(李珥, 1536∼1584)

http://dicimg.naver.com/100/400/91/284191.jpg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34세에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 상위종시설(人心道心 相違綜始說)을, 47세때는 선조임금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40세 때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다. 42세에는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를, 45세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했다. 현재 율곡전서 1,2권이 전해진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 상위종시설 人心道心 相爲終始說>을 선조임금에게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2)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호(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영(瑛)의 딸이다. 아들이 집(集)이다.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奉事)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 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 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 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사련(祀連)의 일로 환천(還賤 :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김장생이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해 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3)박세채(朴世采, 1631∼1695)
조선 중기의 학자·관료.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홍문관교리 의(漪)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 ≪사변록 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7세 때인 1638년(인조 16)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생활 2년 만에 과거공부마저도 포기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이(李珥)의 ≪격몽요결 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했으며, 이이를 존경하였다.
효종 때에 이이·성혼(成渾)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으므로 이에 분개해 과시(科試)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서 배웠는데, 그의 큰아버지 호(濠), 종부 미(瀰)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5월에 마침내 효종이 승하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게 되었다. 그는 제례의 3년 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해 서인 측의 이론가로서 역할하였다. 그가 지은 ≪복제사의 服制私議≫는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의 3년 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다시 서한을 보내어 윤휴를 경책(警責)한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 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 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때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지평(砥平)·원주·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다시 등용되던 1680년까지 6년 간은 도리어 학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소학≫·≪근사록≫·≪대학≫·≪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독서기 讀書記≫를 저술하였다.
또한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 추가한 ≪춘추보편 春秋補編≫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 心學至訣≫ 등을 저술로 남겼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정권교체로, 그는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 皇極蕩平論≫을 발표해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에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계 학자들과 학적 교류와 활동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서 야인생활을 하였다. 이때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학자로써 자질을 발휘한 시기이다. 이 기간 중에 윤증·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해 이른 바 소론계의 학자들과 서신 내왕이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히려는 학문적 변화를 보였다. ≪양명학변 陽明學辨≫·≪천리양지설 天理良知說≫을 비롯하여 ≪이학통록보집 理學通錄補集≫·≪이락연원속록 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 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 三先生遺書≫·≪신수자경편 新修自敬編≫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에는 정계의 영수격인 송시열이 세상을 떠나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는 우의정·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 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그는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 등과 더불어 이이·성혼에 대한 문묘종사 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박세채는 위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즉, 중화적(中華的) 천하가 무너지고 이적(夷狄)의 국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 바 역천패리(逆天悖理 : 천명을 어기고 인륜에 어긋남.)의 위기의식이 만연한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공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학구 생활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긴밀한 연관 속에 이룩된 측면을 볼 수 있다.
그의 학문은 이러한 17세기의 국내외의 상황과 관련하여 네 가지 특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蕩平論)이며,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는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나아가 배척하는 일, 넷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그는 대외정치 면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복명반청(復明反淸 : 청을 배격하고 명을 회복하는 것)의 거사를 알고, 이를 적극 지지해 존주대의라는 정책과제를 제시했으며, 대내적으로는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깊이 깨닫고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고 우려해 그 나름의 탕평 이론을 제시하였다.
존주대의의 정책 과제는 김상헌과 관련할 때 그의 스승에게서 전수된 대외관(對外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의식 속에서 도통수호(道統守護)라는 학적 과제에 대한 간접적인 인과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도통수호 의식은 그가 이미 ≪이학통록보집≫을 저술해 중국 유학의 학통을 밝혔고, 그와 아울러 방대한 ≪동유사우록≫을 써서 조선의 도학연원을 밝힌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의 공적은 수제자 김간(金幹)의 평과 같이 “계개(繼開)의 공과 찬술의 풍부함은 참으로 근대 유현(儒賢)에는 없다.”고 자랑할 만하다. 또한 그가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한 태도는 ≪양명학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고본대학 古本大學≫·≪대학문 大學問≫·≪치양지 致良知≫·≪주자만년정론 朱子晩年定論≫ 등 양명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양명에 대한 비판은 도통수호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설(陽明說)을 신봉함으로써, 사우(師友) 사이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의고결남계서 擬古訣南溪書≫를 써서 “양명의 심설을 바꿀 수 없다.”고 했고, 그 뒤 여러 사우간에 논변이 있었던 만큼 그들의 스승으로써 논변을 질정(質定)하는 뜻에서 이러한 저술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박세채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매우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예학의 대가’라고 칭할만하다. ≪남계선생예설 南溪先生禮說≫·≪육례의집 六禮疑輯≫ 등은 예의 구체적 실천 문제를 다룬 서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 절차까지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의 변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오륜적 근거를 밝히는 예학의 구현이라는 의미가 된다.
고려말(조선초기) 사상적 전환기에 제기되었던 불교의 멸륜성(滅倫性)을 극복하고, 예에 의한 실천 방법으로서 오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가례 家禮≫를 권장하고 ≪삼강행실도≫·≪국조의례≫ 등의 간행은 일종의 범국민적 규범 원리로써 예 의식을 광역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대비의 복(服)에 대해 기년복·삼년복을 주장하거나, 또는 대공(大功)·기년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예송(禮訟)은 당파적 대립의 성격을 띠기도 했지만, 문제는 대립의 성격이 예에 대한 기본 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립적 성격은 분명히 예학의 구현이라는 유학의 기본 과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이며, 예학적 전개라는 발전적 차원이 문제라고 판단된다.
그의 예학적 전개는 ≪육례의집≫·≪변례질문 變禮質問≫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견해는 역시 문인 김간의 ≪동방예설 東方禮說≫에 계승되었으며, 정제두의 글에서 고례(古禮)를 존중하고 간례(簡禮)를 강조하면서 이이·성혼과 더불어 박세채의 예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예설은 정제두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원은 자운산을 배경으로 하여 정남향으로 건립되었다. 경내건축물로는 사당, 내삼문, 강당·동·서재, 외삼문이 있는 데, 강당, 동재, 서재, 외삼문은 1997년에 신축되었다. 강당의 왼쪽 뒤편에 위치한 자운서원 묘정비는 이이의 학덕을 기리고 서원의 연혁을 기록하고자 1683년(숙종 9)에 건립되었다. 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이이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경기도유형문화재 제77호(1978.11.10)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이다. 자운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광해군 7년(1615)에 지은 서원으로, 이이의 묘와 그 조상들의 묘가 있는 파주 법원리에 건립되었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박세채의 제사도 함께 지냈던 곳으로, 효종 즉위년(1649)에 왕이 자운이란 현판을 내리었다.
비는 서원의 자운문 바깥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은 아랫단은 4장의 돌로 짜 맞추고, 윗단은 옆면과 윗면에 각각 구름과 연꽃무늬를 두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金壽增)이 예서체로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