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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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파산서원(坡山書院)
   http://www.nrich.go.kr/kr/mmulti/mContentV.jsp?ca_id=4&arc_id=415&arc_… [1651]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235
   성수침(成守琛) 백인걸(白仁傑) 성수종(成守琮) 성 혼(成 渾)
   1568년(선조 1)
   1650년(효종 1)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0호(1983.09.19지정)
파산서원은 조선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성수침(成守琛), 성수종(成守琮), 성혼(成渾), 백인걸(白仁傑)의 위패를 봉안하고 양성하던 곳이다. 본 서원은 1568년(선조 1)에 이이·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노력으로 창건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1543년에 건립되었는데 25년 후에 파산서원이 상당히 빠른 시기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서원이 건립되었음에도 사액은 상대적으로 늦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성수침의 아들인 성혼이 서인(西人)으로서 동인(東人)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1650년(효종 1) 파주 유생 백홍우(白弘祐)의 상소를 계기로 바로 사액되었다.
1628년(인조 6)에 성혼을 추가 배향하고, 1683년(숙종 9)에 백인걸의 위패를 자운서원에서 옮겨왔다. 1740년(영조 16)에는 성수종을 추가 배향하였다가 이듬해 영조의 서원 철폐정책에 따라 곧바로 출향되었고, 1785년(정조 9)에 파주 유학 조중길(趙重吉) 등의 상소로 다시 배향되었다. 그 후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서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11년(광해군 3)에 복구하였다.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된 후 1966년 현재의 사당 건물만 복원되었다.

1)주벽-성수침(成守琛, 1493∼156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한성부윤 득식(得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충달(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세순(世純)이다. 어머니는 강화부사 김극니(金克怩)의 딸이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 이때부터 과업(科業)을 폐하고 ≪대학≫과 ≪논어≫ 등 경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1541년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학덕으로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선비)로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牛溪)에 은거하였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산현감(禮山縣監)·토산현감(兎山縣監)·적성현감(積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564년 사지(司紙)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했으며, 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미두(米豆)와 역부(役夫)를 지급해주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하였다.
조선 초기 성리학의 토착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사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대의명분과 요순(堯舜)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불가능하게 되자, 은일(隱逸 : 초야에 묻혀 학자로서만 활동)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썼는데 <방참판유령묘갈 方參判有寧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백인걸(白仁傑, 1497∼1579)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庵). 서울에 거주하였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효삼(效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교(參校) 사수(思粹)이고, 아버지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익견(益堅)이다. 어머니는 사직(司直) 우종은(禹從殷)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김안국(金安國)에서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宋麟壽)·유희춘(柳希春)·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 김식(金湜)이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求道)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해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해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 때 예문관 관리가 이조(吏曹)의 인사 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던 옛 관습을 복구해 실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는데 이 때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에는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수찬·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추천 기록)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같은 해 명종 즉위 뒤 윤원형(尹元衡) 등이 대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제거할 때,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으면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鄭順朋)·최보한(崔輔漢)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그 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李芑) 등의 농권을 비난하는 양재(良才)의 벽서를 기화로 소윤(小尹) 세력이 대윤(大尹)의 잔존 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 안변(安邊)에 유배당하였다. 1551년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뒤, ≪태극도설 太極圖說≫과 정주학(程朱學)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등용, 이듬해 사도사첨정(司䆃寺僉正)·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치적으로 고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가 즉위한 뒤 1568년(선조 1) 기대승(奇大升)의 건의로 특별히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공조참의·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 밖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68년에는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오래지 않아 철렴(撤簾 : 수렴청정을 그만둠)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망할 때까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해 사림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李浚慶)의 의견을 좇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비들을 해하려 한다는 사림의 의심을 받아 1571년 파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우참찬으로 징소되었으나 치도(治道)를 논하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함께 다시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서인(西人)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 밖에도 국경의 상황을 논하고 군비를 닦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정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선조 초에는 많은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고 매우 연만해 많은 시간을 파주에 퇴거해 있었다. 이에 선조는 대사헌·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려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하고, 1569년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는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다. 공조참의·대사헌·병조참판으로 선조 임금이 이이·성혼(成渾)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 기묘사화 뒤 명종 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남평(南平)의 봉산서원(蓬山書院), 파주의 용주서원(龍洲書院)과 파산서원(坡山書院), 고창(高敞)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휴암집(休庵集)>이 있다. 인조 때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개시(改諡)되었다.
 
3)성수종(成守琮, 1495∼153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숙옥(叔玉). 한성부윤 득식(得識)의 증손, 할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충달(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세순(世純), 어머니는 김극니(金克怩)의 딸이다. 수침(守琛)의 아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 때 남곤(南袞)·김구(金絿)·김식(金湜) 및 조광조 등이 시관(試官)으로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물러나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과방(科榜)에서 삭제되었다. 그 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았다. 그러나 1566년 그의 아들 이(耳)가 삭방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명종의 특명으로 홍패를 받고 방목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질이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자신은 죽을 먹으면서 매일 세 번씩 상식(上食 : 음식을 올림.)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선조대에 기묘명인(己卯名人)으로 추복(追復 : 명예를 회복함.)되었으며, 물계(勿溪 : 창녕의 물계서원), 세덕사(世德祠),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절효(節孝)이다.
 
4)성혼(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현령 충달(忠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세순(世純)이고, 아버지는 현감 수침(守琛)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사원(士元)의 딸이다. 서울 순화방(順和坊 :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 해 겨울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 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 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했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즉, 그는 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중용≫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75년 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했으나 병으로 사체(辭遞 ; 사양하여 임명이 보류됨.)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사헌부지평 등을 제수했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그의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예빈시판관·장흥고주부·종묘서령·광흥창주부·사헌부장령·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장령에서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更張)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미숙(米菽 : 식량)을 하사하면서까지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했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그는 경연석상 또는 상소로 계속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薪炭 : 땔감의 하나)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龍驤衛上護軍)에 승진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는 다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사옹원정(司饔院正)·사재감정(司宰監正)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그의 관계 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후 이이가 죽자 사양하면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다. 그 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 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했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 ;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다.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 :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힌 글)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0년에는 양민(養民)·보방(保邦)·율탐(律貪)·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1591년에 ≪율곡집 栗谷集≫을 평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이 후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蹕)하면서 불러들여 군무를 도왔다.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 : 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편의시무구조 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 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 : 군사적인 대치 상태를 풀어 강화함.)을 건의한 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 :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원하는 소)를 올린 후, 그 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 ≪우계집≫ 6권 6책과 ≪주문지결 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도 爲學之方圖≫ 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 :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의 허락이 내려짐.)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 : 배향에서 삭출됨.)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廡)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서원은 경사가 심한 파산(坡山)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우계(牛溪)가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역에 건립되었다. 경내건물로는 사당과 삼문 등 배향공간만 존재하는 단조로운 형태이고, 서원 앞으로 홍살문이 있으며, 서원의 왼쪽에 재실(齋室)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으로 매우 소박하게 지어졌으며 내부에는 성수침을 주벽에 안치하고 좌우에 성수종·백인걸·성혼을 배향하였다. 재실에는 ‘찰륜당(察倫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경현단(景賢壇)
한편 재실 옆에 인접해 있는 경현단(景賢壇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은 1807년(순조 7)에 지역유림들이 조감(趙堪), 성문준(成文濬), 신민일(申敏一) 등 3인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제향을 받은 곳이다. 경현단에는 세 분의 단비가 있으며, 단의 내부에는 오른쪽부터 조감(趙堪), 성문준(成文濬), 신민일(申敏一)의 호를 새긴 비석이 서있다. 각각 옥천 조선생(玉川 趙先生), 창랑 성선생(滄浪 成先生), 화당 신선생(化堂 申先生)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서있다. 현재 건물은 1977년에 다시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