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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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동명서원(東溟書院)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조인벽(趙仁璧) 조 사(趙 師)
   1628년(인조 6)
   
   음력 3월 정일(丁日)
   
동명서원은 1628년(인조 6) 양양읍 조산리에 건립되었다. 원래 고려 말의 충신이었던 조인벽(趙仁璧)을 배향하였으나 후에 그의 넷째아들 조사(趙師)를 함께 모시게 되었다.
처음 창건은 조산리였으나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그의 제자와 후예들이 1786년(정조10)에 경북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에 이전 복원하였다.
그 후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게 되었으나 1898년(광무 2)에 재건을 목적으로 강원도관찰사 조종필(趙鐘弼)이 창건지인 조산리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으며, 1979년 양양지역 유림과 한양 조씨 종중에 의해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1982년 지금의 자리에 사당과 강당이 건립되었다. 매년 음력 3월 정일(丁日)에 제례행사가 봉행되고 있다.
2005년 4월 5일 산불로 사당(충혈사)이 소실되었다.

1)주벽-조인벽(趙仁璧, ?~1393)
본관은 한양(漢陽).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돈(暾)이고, 부인은 환조(桓祖 : 李成桂의 아버지인 李子春)의 맏딸인 정화공주(貞和公主)이다.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호군(護軍)이 되었고,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경성(京城)을 수복하는 데 공이 있어 1363년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72년 가주(家州)에서 관리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자 판사(判事)로서 평정했다. 이해에 만호(萬戶)가 되어 함주(咸州)·북청(北靑)에서 왜구를 대파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승진했다. 이후 밀직부사가 되었는데, 1375년(우왕 1) 공민왕 때 역모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숨어 있던 충혜왕의 서자(庶子) 석기(釋器)를 체포하여 왕으로부터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1377년 왜선(倭船) 45척이 신주(信州)·옹진(甕津)·문화(文化) 지방에 침입하자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판밀직(判密直)으로 화포를 사용하여 수군을 훈련시켰으며, 1379년 왜구가 강릉도(江陵道)에 침입하자 강릉도원수가 되어 격퇴했다. 이듬해 강릉도상원수가 되었고, 1382년에도 왜구 3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1383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동북면도체찰사가 되어 명나라의 변경 침범에 대비했다. 1385년 왜구가 교주도(交州道)에 침입하자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교주도원수가 되어 물리쳤다.
1388년 위화도회군에 가담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된 후 강화 및 여흥군(驪興郡)에 유폐된 우왕을 찾아가 의대(衣帶)를 전하고 잔치를 베푸는 직임을 맡기도 했다. 1389년(공양왕 1)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회군공신(回軍功臣) 2등에 책록 되었다. 조선 개국 후인 1393년(태조 2)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야인(野人)과 왜구의 정벌에 무공이 컸으므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았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2)조사(趙師)
조사(趙師)는 시조 중서공(中書公)의 6세손으로 양렬공〔襄烈公, 휘 인벽(仁璧)〕의 넷째 아드님이다. 양렬공은 처남인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수차례 출사(出仕)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지켜 강원도 양양으로 내려갔다.
1628년(인조 6) 양양부사 조위한(趙緯韓, 양절공의 8세손)과 지방 유림이 뜻을 모아 양양 조산리에 동명서원(東溟書院)과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양렬공을 봉향하였다.
가천재공의 사적은 족보와 조선왕조실록에 약간 실려 있는 것 이외는 전해 오는 것이 별로 없다. 족보에 의하면 공은 태조 이성계의 생질로서 누차 벼슬길에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양렬공이 있는 양양으로 가서 오직 충절로 세상을 마치니 조정에서는 그 후 예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의 직책을 내렸다. 공의 행적(行蹟)은 삼은〔三隱 :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과도 뜻을 같이 한 충효와 절의로서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될만하다. 정종(定宗)이 일찍이 공의 중씨(仲氏)되는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휘 연(涓)〕에게 말하기를 “경(卿)의 아우 사(師)는 충효양전(忠孝兩全)했다” 고 하였다.
공이 동명서원 충현사에 배향된 연혁은 다음과 같다. 1628년 동명서원 창건 당시에는 양렬공 한 분만 봉향되었으나 1686년 서원이 소실(燒失)되고 백년이 지난 1786년 경북 봉화에 병참공파 후손이 서원을 재건하여 양렬공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병참공파의 단구공〔丹丘公, 11세조 휘 정(貞)〕과 공을 나란히 배향한 사실이 1849년에 간행된 기유보(己酉譜)에 전해 온다.
그 후 봉화의 서원이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81년 양양에 서원이 복원되면서 충현사에 공이 배향되고 있다. 공께서는 한 때 살던 곳을 와선대(臥仙臺)라 이름하고 가치천(嘉致川)에서 매일 유유자적(悠悠自適)함으로써 호를 가천재(嘉川齋)로 삼은 것이나 공의 재실 편액(扁額)을 치천재(致川齋)로 이름붙인 것은 여기에서 연유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은 1432(세종 14)년 음력 10월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공이 유언하기를 “나 죽은 후에 포은(정몽주) 묘소 근처에 묻어 지하에서라도 따라 노닐게 해 달라” 하였는데 자손들은 그 유지(遺志)를 받들어 이와 같이 장례를 모시었다. 이로 보면 공은 포은을 인생과 학문의 선배로서 또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평소 사숙(私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의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언양(彦陽) 김씨(金氏)로 대사헌 계생(繼生)의 따님이다. 큰 아들 휘 맹발(孟發)은 현령, 둘째 휘 중발(仲發)은 현감, 셋째 휘 계발(季發)은 녹사(錄事)이다. 제향은 음력 10월 4일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묘소에서 받들고 있다.
 

1979년 양양지역 유림과 한양 조씨 종중에 의해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1982년 지금의 자리에 사당과 강당이 건립되었다.

서원유허비와 동명서원중건비를 비롯하여 <동명서원중수기>·<동명서원봉안문>등이 있으며, 재산으로 서원부지 약 600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