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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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창절서원(彰節書院)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14리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 개(李 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박심문(朴審問) 엄흥도(嚴興道) 10분 배향
   1685년(숙종 11)
   1699년(숙종 25)
   음력 2월 8월 중정일(中丁日)
   강원도유형문화재 제27호(1971.12.16지정)
창절서원은 1685년(숙종 11)에 창건되었으며,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위패를 모셨다. 1699년(숙종 25)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서원의 명칭인 창절(彰節)은 불의에 항거하고 대의에 따라 비장하게 최후를 마친 충신의 절개를 길이 표창한다는 의미이다.
1685년(숙종 11) 창건 당시에는 강원감사 홍만종(洪萬鍾)과 군수 조이한(趙爾翰)에 의해 육신사(六臣祠)로 시작되었는데, 1705년(숙종31) 육신사를 밖으로 이건하면서 창절사(彰節祠)로 개칭하였으며, 1788년(영조 12)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91년(정조 15)에는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을, 1828년(순조 28)에 박심문(朴審問)을, 1833년(순조 33)에 엄흥도(嚴興道)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서재는 한말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육신사는 강학 공간인 강당을 지나 사우인 창절사로 들어가는 문이며, 창절사는 정면 5칸·측면 2칸의 부연이 있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창절사의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있다. 지금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박팽년(朴彭年, 1417~1456)
박팽년은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인수(仁叟)이고,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며, 본관은 순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뒤 그를 형조 참판으로 임명했으나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김질의 변절로 탄로나 처형되었다.
숙종 때 누명을 벗고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2)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성삼문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이 신숙주·박팽년·최항·이개·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집현전학사로서 동참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약하여 1년도 못되어 승하하자, 세종의 손자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음모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문종의 고명대신인 황보인·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공신의 호를 내렸으나 성삼문은 기뻐하지 않았다.
1455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강제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며 이 때 예방승지로 있던 성삼문은 국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에도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은 끈질기게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456년 명나라의 사신을 초청하는 환영식의 날을 기하여 상왕(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수립했으나 거사 며칠 앞두고 김질의 변절로 탄로 나고 말았다. 성삼문은 박팽년·이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받았으니 이들이 곧 사육신이다. 이어 아버지 승(勝)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삼고·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맹년·맹종 및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성삼문이 죽음을 당한 후 집을 몰수하여 뒤졌을 때 1455년 이후 나라에서 준 쌀은 하나도 먹지 않고 녹(祿)이라고 써서 붙인 채 창고에 쌓아 놓기만 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1758년(영조 34) 성삼문을 이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하였다. 논산 지방에는 본 서원 외에 금곡서원에 제향처가 있고 가야곡면에 성삼문 사당이 따로 세워졌으며 또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는 성삼문의 일지체(一肢體)가 묻혀있는 묘소가 있다.
 
3)이개(李塏, 1417~1456)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1436년(세종 18)에 등재, 1447년(세종29)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들었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이 청절하여 이름이 높았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피살되었다. 당시 이개가 읊은 시는 충절을 잘 드러낸 명시로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진상을 자백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며 평소 숙부인 이계전(李季甸)이 세조에게 내왕함을 항상 경계하였다. 혹심한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안색조차 변함이 없어 보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1758년(영조 38)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4)유성원(柳誠源, ?~1456)
유성원은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琅玕)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1444년(세종 26)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세종 29)에는 중시에 합격, 집현전에 뽑혀 이름을 떨쳤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교서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고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했으나 유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 끝에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金礩)의 변절로 탄로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칼로 자결했다. 숙종 때 시호를 절의(節義)라 내렸고, 영조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다.
 
5)하위지(河緯地, 1387~1456)
하위지의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라 하고, 호는 단계(丹溪)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145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성미가 과묵하고 공손했으며 항상 집현전에서 경연(經筵)에 왕을 모시며 학문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종의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서원 중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 때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창절사(彰節祠)·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다.
내삼문(內三門)에는 「六臣祠(육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문을 통해 사당으로 들어가면 정면 5間, 측면 2間의 맞배지붕의 창절사와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사육신을 비롯하여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 엄흥도가 배향되어 있다. 경내에 있는 문루인 배학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1층은 앞면 3칸에 모두 문을 설치하였고, 2층은 누각으로 되어있다. 강원도에 있는 사당이나 서원 중 대문이 문루인 곳은 이곳뿐이다.
창절사는 현재 남아있는 강원도 내의 사당이나 서원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지어졌을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