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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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광암서원(廣巖書院)-미복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2리 서원말
   정시한(丁時翰)
   1721년(경종 1) 현재는 서원터만 남아있슴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을 봉안하였던 곳으로 『조선환여승람』에는 향현사(鄕賢祠)로,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광암사우(祠宇)로 기재되어 있으며, 사천년문헌통고(四千年文獻通考)에는 광암사(廣巖祠)라고 기재되어 있다. 건립과 훼철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천년문헌통고에는 1721(경종 1)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강당 터에는 광복 후까지 건물이 존속하였다고 한다. 혹 광암서원이라고 하고, 이 사당 터가 있는 마을을 서원 말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아 19세기 이후에 서원으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1)주벽-정시한(丁時翰, 1625∼1707)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군익(君翊), 호는 우담(愚潭). 서울 출생. 대사헌 윤복(胤福)의 증손으로, 관찰사 언황(彦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횡성 조씨(橫城趙氏)로 직제학 정립(正立)의 딸이다.
강원도 원주 법천(法泉)으로 낙향해 평생 벼슬길을 멀리했다. 오직 이현일(李玄逸)·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 집의·성균관 사업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를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90년(숙종 16) <만언소 萬言疏>를 올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 ‘집안 다스리기를 엄격히 할 것’, ‘나라의 근본을 배양할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인재를 쓰고 버림에 신중히 할 것’, ‘언로를 열 것’의 6조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상소의 구절에 임금이 분노해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진선으로 나아갔다.
1691년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집권하는 권력 교체의 기사환국을 맞았을 때, 그 자신은 남인에 속하면서도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이 잘못이라고 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 당하였다. 이 해에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퇴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1694년 서인들의 민비(인현왕후) 복위 운동으로 갑술옥사가 일어나 민비가 복위되어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실세하자, 1696년 희빈 장씨를 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하는 데 대해 다시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처럼 그는 당파적 입장을 떠나 일관된 의리론적 입장을 지키고 있다.
그의 생애와 인품에 대해 ≪숙종실록≫에서 사신 (史臣)은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버리고 편안하게 고향에서 지냈다. 어버이를 섬겨 효도했으며, 성품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워 남과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가정은 가난하지 않았으나 검약을 법도로 삼았다. 그의 어머니가 천수(千壽)를 다하고 그의 나이 이미 60인데도 능히 상제(喪制)대로 다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송하였다.”고 하여, 산림도학자로서의 고결한 풍격을 보여 준다.
저술에는 문집인 ≪우담집 愚潭集≫을 비롯, <임오록 壬午錄>·<만록 漫錄>·<산중일기 山中日記>·<관규록 管窺錄>·<사칠이기변 四七理氣辨>·<변무록 辨誣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성리설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을 정밀하게 분석해 이황(李滉)의 입장을 명석하게 해명하고 도통을 계승한 데 있다.
따라서, 이익(李瀷)도 정시한의 학문적 공적을 평가해 “학문의 정맥에 거슬러 올라가 이어감으로써 <사칠변증 四七辨證>을 저술하니 크게 빛나서 밝았다.”고 지적하였다. 정약용(丁若鏞)도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이후로 진정하고 순수한 유학자는 오직 선생 한 분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