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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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산양서원(山陽書院)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산양리 843
    황 희(黃 喜)
   1824년(순조 24)
   
   
   척산양서원묘정비-강원도문화재자료 제123호 (1998.04.18지정)
소동사(召東祠)는 1824년(순조 24) 홍명섭(洪明燮), 이우석(李禹錫), 민기용(閔夔鏞) 등의 사림들이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를 제향하기 위하여 소동사(召東祠)를 창건하였다. 그 후 1857년(철종 8) 산양서원으로 승격시키고 4년 뒤인 1861년(철종 12)에는 묘정비까지 세워 삼척시 남쪽의 유일한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고 학위전(學位田)은 삼척향교에 귀속되었다.
산양서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는 1423년(세종 5) 영동지방에 대기근이 들어 세종이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 하였던 바, 황희는 각 고을을 직접 시찰하여 곡창을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정성을 다하여 구호하니 한 사람도 굶어 죽은 사람이 없었다. 세종은 기쁘게 생각하고 조복(朝服) 한 벌을 하사하고, 판우군부사(判右軍府使)로 승진시켰다. 황희가 영동지방을 순찰하며 백성들을 구제할 때, 원덕읍 남쪽 와현 고개마루에서 동해의 푸른바다를 굽어보면서 쉬어갔다. 백성들은 그의 덕과 은혜를 잊지 못하여 이곳에 표적이라도 남기고자 이 자리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소공대(召公臺)라 불렀다. 현재 대는 무너져 평지가 되었다. 1516년(중종 11) 강원도 관찰사로 왔던 황희의 증손 황맹헌(黃孟獻)이 대를 새로 쌓고 비를 세웠는데, 이 비는 60년 뒤 바람에 넘어져 버러진 것을 1578년(선조11) 이곳 부사로 왔던 황희의 6대손 황정식(黃廷式)이 사직 앞에서 돌을 구하여 비를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 곳 사람들은 황희정승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소동사를 세워 제향하게 되었다.

1)주벽-황희(黃喜, 1363∼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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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상왕(上王 :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으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1913년 5월 일제하 원덕면 임원리 국사유림 경계측량 사건에 따른 일본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거하는 유림에 대한 보복의 수단으로 일본 헌병이 서원 건물에 방화하여 건물 일체가 소실되었다가 2002년 삼척시에 소실된 서원을 복원하였다 . 삼척시는 2005년부터 4억 5,000여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묘정비 주변 정비사업에 착수, 관리사를 신축하고 정문을 복원하는 등 정비사업을 마쳤다.

1)삼척산양서원묘정비(三陟山陽書院廟庭碑) -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23호
(1998.04.18지정)
1423년(세종 5)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된 황희는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고(官庫)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삼척지방에서는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소공대(召公臺)라 하였다. 1516년(중종 11) 4대손 황맹헌(黃孟獻)이 이곳에 비를 세웠고, 풍우로 무너진 것을 1578년(선조 11) 6대손 황정식(黃廷式)이 다시 세웠다. 1824년(순조 24) 사림(士林)에서 소동사를 세웠고, 후에 산양서원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