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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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노동서원(魯東書院)
   강원도 홍천군 서면 어유포리 32
   최 충(崔 冲) 최유선(崔惟善)
   미상
   
   음력 9월 상정일(上丁日)
   영정(강원도 일반동산 문화재), 제기일체
노동서원(魯東書院)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원조인 최충(崔冲)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 그리고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최충의 12대 손인 최변이 이곳에 낙향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지었다가 후에 노동서원이라 개칭되었다.
서원에 봉안된 두 분의 영정은 1628년 (영조 24)의 거작(巨作)으로서, 1984년 6월 27일 강원도 일반 동산문화재(江原道 一般 動産文化財)로 각각 등록되었으며 그 외 제기(祭器) 일체가 또한 문화재로 등록, 현재 서원(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대지 1500평에 건평 20평의 정전(正殿)과 14평 의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으며 내삼문(內三門)과 외삼문(外三門)이 각각 2棟씩 있다. 정전(正殿)에는 문헌(文憲), 문화(文和) 두 분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동재와 서재는 유인(儒人)들이 체류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강론하는 곳이다. 또 유교적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 을 위한 행사의 장으로도 쓰이며 특히 인근 초,중,고 학생들의 유적순례지로서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본 서원은 원래 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있던 것을 수호(守護)의 어려움으로 인 하여 1932년 5월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6.25동란에 소실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일부를 개축(改築)하고 수차에 걸쳐 중수(重修)하였다. 또한 정례행사인 제향을 유림행사(儒林行事)로서 받들며 년 1회 봉제사를 올린다. 제향일은 음력 9월 상정일(上丁日)

1)주벽-최충(崔冲, 984∼1068)
고려 전기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온(溫)의 아들이다.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해 ≪칠대실록 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우보궐(右輔闕)·기거사인(起居舍人)·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郎諫議大夫)에 올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漢)의 자사육조(刺史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다. 정종 초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상서좌복사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서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옮겼다.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했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 금지를 청해 시행하게 했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함께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문하시중 상주국 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을 받았다. 1055년 내사령(內史令)이 되었고,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렇게 관인으로 치사 후에 교육과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고려사≫ 열전에,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충에서 비롯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鄕學)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문교(文敎)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었다. 특히, 문반(文班)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었으며, 또 왕실·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그가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방의 이름을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 등으로 지어 구재학당을 마련, 본격적인 사립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질서와 법도를 갖춘 교육사업을 전개해, 당시 이곳의 학생은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 또는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 불렸다. 구재(九齋)에서는 구경(九經:周易·尙書·毛詩·儀禮·周禮·禮記·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삼사(三史 : 史記·漢書·後漢書)를 중심으로 시부(詩賦)와 사장(詞章), 즉 문학이나 유교 교육의 일방적인 요청에 따라 문장공부도 많이 시켰다. 그러나 과거를 위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이며 함축성 있는 인격도야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교육방침은 하과(夏課)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즉, 여름에는 피서를 겸해 개경 탄현(炭峴) 밖에 있는 귀법사(歸法寺) 등의 산사(山寺)·승방을 빌려 공부하였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제자 중 아직 관리가 되지 못한 자를 선정해 함께 생도들을 가르쳤다. 간혹 저명한 학자나 대관들이 들르면, 생도들과 함께 초에 금을 긋고 시간 내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회(刻燭賦詩會)를 개최하였다. 이 때 성적을 발표해 차례로 불러 앉히고 소작(小酌)을 베푸는데 진퇴의 절도와 장유(長幼)의 서열이 분명해 종일토록 서로 수창(酬唱)하는 것이 볼만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최충의 교육사업은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를 볼 사람은 그의 도중(徒中)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또 이것을 모방해 개경에 11개소, 합하여 12도의 사학이 다투어 세워지게 되었다. 이들 도의 설립자는 모두가 학식과 명망이 있고 벼슬과 지체가 높았으며, 대체로 과거시험관을 지내고 유학에 힘쓴 선비들이었다. 따라서, 사학은 관학을 압도해 널리 오래도록 번창해나갔다. 그 중에서도 그의 도가 제일 먼저 권위가 있었으며, 성황을 이루어, 그는 한국사립학교의 원조가 되었으며,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의 사업은 자손에게 계승되어 자손들이 문행(文行)으로 출세했을 뿐 아니라, 후진교육에 힘써 문헌공도는 학계의 중심체가 되었다.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인데, 이것은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2)최유선(崔惟善, ?∼1075)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중서령(中書令) 충(冲)의 아들이다. 1030년(현종 21) 과거에 급제하여 7품으로 한림원에 들어갔다. 그뒤 1047년(문종 1)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105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역임했다.
1055년 지중추원사로 공부시랑 이득로(李得路)와 조상회장사(弔喪會葬使)가 되어 거란 흥종(興宗)의 장례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그 뒤, 1061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를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추충찬화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개부의동삼사 수태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師上柱國)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대를 이은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사리에 밝았으며 여러 차례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수태위 중서령(守太尉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화(文和)이다.

대지 1500평에 건평 20평의 정전(正殿)과 14평 의 동재(東齋), 서재(西齋)와 내삼문(內三門)과 외삼문(外三門)이 각각 2棟씩 있다. 정전(正殿)에는 문헌(文憲), 문화(文和) 두 분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동재와 서재는 유인(儒人)들이 체류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강론하는 곳이다.

서원에 봉안된 두 분의 영정은 1628년 (영조 24)時의 거작(巨作)으로서, 1984년 6월 27일 강원도 일반 동산문화재(江原道 一般 動産文化財)로 각각 등록되었으며 그 외 제기(祭器) 일체가 또한 문화재로 등록, 현재 서원(書院)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