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정분(鄭苯, ?∼145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유(子甹), 호는 애일당(愛日堂). 할아버지는 신중(臣重)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오(以吾)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년(세종 4) 사간원우헌납이 되었고, 이어 좌헌납·병조정랑·의정부사인에 올랐다. 1428년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수재 상황을 살폈다. 1429년 사헌부집의에 올랐으며, 이듬해 결송사(決訟事)로 수금되어 원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버지의 소청으로 양주에 이치(移置)되었다.
1432년 승정원우부대언에 발탁되었다. 이후 좌부대언·우승지·좌승지가 되었으나, 곧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6년 충청도감사가 되었고, 1438년 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43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9년 전제상정소제조(田制詳定所提調)를 겸대했고, 세종이 옮겨 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을 짓는 일을 감독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우찬성에 오르면서 계속 판이조사를 겸임했고,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연변주현(沿邊州縣)의 성터를 살폈다. 1452년(단종 즉위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賜死)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황보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86년(정조 10)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2)정지산(鄭之産, 1423∼146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평(彦平), 호는 포옹(逋翁). 아버지는 목사 효안(孝安)이며, 어머니는 소감(少監) 유찬(柳瓚)의 딸이다. 종숙인 우의정 분(苯)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깊어 이름을 떨치더니 1445년(세종 27)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50년에 호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현감으로 나갔다가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와 그의 양아버지인 분을 죽이자 벼슬을 버리고 공주 동혈(洞穴)에 들어갔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몇 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양어머니 정씨(河東鄭氏)를 그곳에 모셔 지성으로 봉양하니 사람들이 그 집을 가리켜 충효의 가문이라 하였다. 단종이 비명에 죽자 항상 영월 쪽을 향하여 앉아서 옛 임금을 사모하였다.
1459년(세조 5)에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단종과 단종을 위하다가 죽은 충신들의 넋을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초혼하여 제향 하였다. 산채와 어류를 캐고 잡아 숙모전의 제향을 받들면서 <채미가 採薇歌>와 <자규사 子規詞>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뒷날 정조 때 판서에 증직되고, 충신·효자의 정려가 내려졌다. 장릉(莊陵) 충신단과 동학사 숙모전 서무(西廡)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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