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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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명탄서원(鳴灘書院)
   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 210번지
   이명성(李明誠) 이명덕(李明德)
   1490년(성종 21)
   1585년(선조 18)
   3월 5일, 9월 5일
   충절사-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70호(1984.05.17지정)
명탄서원은 여말 선초의 학자 이명성(李明誠)과 이명덕(李明德)의 학행을 기리기 위하여, 1490년(성종 21)에 건립되었으며, 1585년(선조 18) 사액되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이나 열읍원수사적(1759, 1763)과 같은 사서에 기록이 없고, 1858년에 간행된 공산지에 처음 기록이 찾아지는 것으로 보아, 명탄서원의 건립 연대는 다시 한 번 확인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967년 간행된 명탄서원지에 의하면, 명탄서원은 1490년 공주 명탄에 건립된 당시에 명탄서원이라 사액 받았다고 적고 있으나, 우리나라 서원제도의 발달사를 참고하여 본다면, 사액이 이 시기에 이루어질 수는 없으므로 당시의 건립은 사묘(祠廟), 혹은 부조묘의 형태였다고 생각된다.

1)주벽-이명성(李明誠, 생몰년 미상)
공주 이씨로 자는 경장(敬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전공판서 충정공 엽(曄)의 둘째아들이다. 고려 말에 적성감무(積城監務)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올랐다. 목은 이색의 문인이며, 포은 정몽주와 교류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동생 명덕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나서 만월대에서 정몽주와 이별하고 강원도 이천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그리하여 사후 여말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으며 조선 초 성종 대에 사림의 발의로 문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이명덕(李明德, 1373∼144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아버지는 엽(曄)이다. 1396년(태조 5)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보직되었으며, 사헌부감찰·사간원우헌납·장령·사인·집의·좌사간대부·형조참의 겸 지도관사(刑曹參議兼知都官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태종 15)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이 되고 좌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으로 전임하였고, 그 뒤 강원도관찰사·예조참판·대사헌·동지총제를 역임하였다. 1430년(세종 12)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1438년 중추원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다. 1442년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지중추원사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판중추원사에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충절사(忠節祠)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익공양식으로 삼문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삼문의 전면 우측에는 1985년에 건립된 김희진이 짓고, 조득상이 써서 건립한 묘정비(廟庭碑)와 강당 및 고직사가 우측에 붙어있고,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서원 뒤편에 이명덕의 가묘(假墓)와 묘비(墓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