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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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문서원(龍門書院)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339-4
   이유태(李惟泰)
   1660년 용문서재건립,1986년 서원개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90호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를 제향한 용문서원은 1986년에 새롭게 창설된 것이지만, 사실 그 유서는 이유태가 생전에 저술과 강학을 했던 용문서재(龍門書齋)에서 비롯된다.
용문서원의 유서가 된 것은 이유태가 말년에 중동골에서 거주하면서 강학하던 중동서재(中洞書齋)와 용문서재인데, 중동서재는 이유태가 거주하던 집에 있던 것이고, 용문서재는 현재 용문서원과 종가가 있는 자리에 있던 것으로 주로 이유태의 문하생들이 거주하면서 공부한 곳이라고 한다. 용문서재는 후손인 이재원(李在元)이 용문서사라고 이름을 고치고, 잠시 이유태를 제향하기도 하였으니, 관의 허락이 없이 사사로이 선현을 제사지내는 것은 의리에 맞지 않는다고 중단하였는데, 이것이 용문서원의 시초라도 할만하다. 이유태가 말년에 거주하고 또 그 후손들이 대대로 생활해 온 공주에 이유태를 제향하는 서원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유림들과 후손들이 용문서재가 있던 자리에 용문서원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각 향교 및 서원에 통문을 돌려 1986년 마침내 용문서원을 건립하였다.

1)주벽-이유태(李惟泰, 1607∼168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아버지는 유학 서(曙)이다. 김집(金集)의 천거로 1634년(인조 1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이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대군사부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1658년(효종 9)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복제시비 때 호군으로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뒤 이어 효종 말년 이래 적어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하고 구민(救民)·구국(救國)의 대책을 제시, 왕이 비변사로 하여금 검토하게 했으나 제대로 채택되지 않자 실망해 사직, 귀향하였다. 그 뒤에도 이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이조참판 등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복제를 잘못 정했다는 남인 윤휴(尹鑴) 등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 영변에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불만 끝에 죽었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 喪禮備要≫·≪의례문해 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했으며, 특히 치국경제(治國經濟)의 문제에서는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즉, 우선 당시 민폐와 국정 동요의 근본 요인이 농민의 유리와 토지의 황폐에 있다고 보고 안정책으로 향약에 의한 향촌조직과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의 실시, 양전(量田) 시행과 사창(社倉) 설치를 주장하고, 양인(良人) 이상 자제의 취학과 15세 이후 능력에 따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선택을 역설하였다.
구체적인 변통책으로서는 어염세(魚鹽稅)의 국고 전환과 면세전의 폐지, 내수사의 혁파, 부세(賦稅) 및 인역제(人役制)의 개혁, 공안(貢案)의 조정과 감축, 양전제의 개선, 관제의 개편과 합리적 운영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김집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송준길·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산림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론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인들이 고향에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했다가 1713년 일시 훼철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초려집≫ 26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용문서원은 사우와 동·서 재실, 강당 겸 유물관, 장서각이 있다. 솟을삼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장서각과 정면 4칸, 측면 2칸의 유물관인 징원당(徵遠堂)이 있고, 그 위쪽으로 강학 공간으로는 존성재(存省齋)와 중화당(中和堂)이라고 하여 동·서 재실을 마련하고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으로 정면에는 명덕사(明德祠)라고 쓰여진 현판이 있다.

1)초려 이유태유고-충청남도도지정문화재 제104호(1984.01.11지정)
이것은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가 남긴 문집이다. 문집의 구성을 보면 상소 1책, 초려시필(草廬時筆) 2책, 수고본(手稿本) 1책 등 총 4책이다. 이것은 이유태의 학문과 사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초려 이유태의 유물 -충청남도민속자료 제5호(1984.01.11지정)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의 유품이다. 초려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과 더불어 3현 중 한 사람이다. 현존하는 유품으로는 백자, 호패, 인장, 옥관자, 표주박, 첨통과 강경통이 있다. 백자는 초려 선생의 묘 이장 때 출토된 것으로 모두 2개이다. 하나는 높이 23㎝, 바닥지름 7.5㎝, 입지름 9.3㎝인 중품(中品)이고, 다른 하나는 높이 16㎝, 바닥지름 9.5㎝, 입지름 10㎝의 색이 아주 맑은 상품(上品)이다. 호패는 조선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하던 신분증으로, 초려 선생이 사용한 상아 1개와 후손이 소지한 목제품 8개가 있다. 인장은 도장을 뜻하는 것으로, 옥에 해태상을 새긴 것 1개와 목제로 만든 4개가 있다. 옥관자는 망건에 달아 당줄을 걸어 넘기는 구실을 하는 작은 유리고리로, 1쌍이 있다. 첨통과 강경통은 문필구의 한 종류이다.
 
3)초려 이유태선생유고(수택본)-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2호(1988.03.30지정)
조선 현종 때의 학덕이 높은 유학자인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의 유고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