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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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유곡서원(柳谷書院)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하류리 315번지
   한 교(韓 皦). 이유택(李惟澤)
   光海 3년(1611)년
   高宗 8년(1871)년
   음력 3月21日
   
금산군 금성명 하류리 유곡에 있는 사당으로 유곡사에는 문충공 한교와 유곡 이유택 두분의 효자 현인을 모신 사당이다.
현종15(1647년)에 건립되었으며 숙종28년(1702년)에 유곡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복호2결을 내려 자손만대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1871(고종8년)에 사원철폐로 훼철되었다. 후손과 지역유림이 1964년에 복원하여 해마다 지방유림에서 음력 3월21일에 제향을 지낸다.

1)한교(韓皦)
선생의 성은 한(韓)이요, 휘는 교(皦), 자는 명보(明甫), 호는 회묵재(晦黙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니 금주 영각리에서 탄생하시다. 공민왕 경자에 급제하여 삼세왕조에 청현봉사하시다. 관이 보문각직제학에 이르매 좌리의 공훈으로 금계군을 봉 하시다. 불행히 난신들로 인하여 사퇴하고 고리로 돌아와 순거하시다. 공의 효성에 감회하여 일리가 효자가 됨으로 이름하여 효자리니라. 임진에 왜구가 침입하여 군읍이 화를 입을 시 이마을은 효자비를 보고 감복하여 적이 침입하지 아니하여 병화를 면하니라.
명종 5년에 정려를 세우고 동 구년에 문충의 시호를 받고 숙종 28년 1702년에 유곡사를 사액한 사적이 국승과 읍지에 기록되었다.
세세이 기록치 아니하나 어느때 어떠한 사연으로 비체가 이같이 되었는지 보는 사람으로 한스럽기 짝이 없다. 일찍이 이 비각을 중수하려 하였으나 왜경이 불허하여 이루지 못하고 비각이 손실되었다. 비도 이 마을을 떠날 수 없으며 마을 또한 이 비가 없을 수 없음으로 이를 다시 세우니 후인은 영세보존하라.
 
2) 이유택(李惟澤)
선조 33년 庚子(1600) - 현종 9년 戊申 (1668) 동안 생존했으며 호(號)는  유곡(柳谷)이고 관직(官職)은  대흥현감을 지냈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하류2리 (정문동)에 묘소가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6일 에 세일사를 지낸다.
그가 69세 노인이 된 뒤에 어머니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셨는데, 상을 치르는 동안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해 몸이 다 상하였다.
혹시라도 밥상에 맛있는 반찬이 올라오면 집안 사람들을 꾸짖어 물리쳤다. 어머니가 무덤 속에 계시는데 자기 혼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석 달 동안 무덤을 지키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삼년상을 치르다가 상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마쳤다. 숙종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1674년에 정려를 세우게 하였으며, 복호(復戶) 2결과 함께 논밭을 내렸다. 문충공 한교와 같이 모시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기려서 1694년에 사우를 세우고 대대로 제사지냈다.
아우 이유태도 금성면 하류리에다 서당을 차리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효도하는 생활을 몸으로 보이며 가르쳤다. 이곳에 세워진 서원을 그의 호를 따서 초려서원이라고도 하며, 형인 이유택의 호를 따서 유곡서원이라고도 한다.
이유택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 그의 집에 어미닭 한 마리가 있었는데, 병들어 곡식도 쪼아먹지 못했다. 그러자 지난해에 낳았던 병아리 한 마리가 어미닭을 따라 다니면서 부리로 곡식을 물어다 먹여 주었다.
그렇게 몇 달을 먹이다가 어미닭이 죽자 병아리가 슬퍼 날뛰면서 울부짖었다. 며칠 동안 슬퍼하다가 결국 병아리도 죽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면서 "효자의 효성에 병아리들도 감화되었다." 고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