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윤전(尹烇, 1575∼1636)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찬(燦).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회숙(晦叔), 호는 후촌(後村). 병사(兵使) 선지(先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돈(暾)이고, 아버지는 증참판 창세(昌世)이며, 어머니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부제학(副提學) 혼(渾)의 딸이다. 황(煌)의 아우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저작이 되었다. 1613년 유생 이위경(李偉卿)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폐모소를 올렸을 때, 한림 엄성(嚴惺)·권확과 함께 이위경의 상소를 정지시키려다가 도리어 파면되었다.
그 뒤 박사로 다시 임용되어 전적·감찰을 거쳐, 1615년 호조좌랑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시 이위경 등에게 몰려 파면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경기도도사로 복직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곧 인조가 있는 공주로 가서 공조정랑이 되었으며, 환도 후 1626년(인조 4) 지평이 되었다.
이 때 대사헌 박동선(朴東善)과 함께 관가와 사대부가의 연료 독점에 대한 백성의 원성을 대변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시종(侍從)하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강화로 들어가 분병조정랑·공조정랑·사예·예빈시정(禮賓寺正)을 역임하고, 익산군수를 지냈다.
1633년 종묘서령(宗廟署令)·직강·장령 등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필선으로 빈궁(嬪宮)을 배종(陪從)해 강화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성이 함락되자 식음을 폐하고, 송시영(宋時榮)·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하기로 결의, 두 번이나 목을 매었으나 구출되자 다시 패도(佩刀)로 자인(自刃)하려다가 미처 절명하기 전에 적병을 크게 꾸짖고 피살되었다.
사람됨이 돈후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2)윤순거(尹舜擧, 1596∼166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황(煌)이며, 어머니는 당대의 명유인 성혼(成渾)의 딸이다. 죽산부사를 지낸 큰아버지 수(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가 척화죄로 귀양가고, 작은아버지 전(烇)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상의원주부·형조좌랑·안음현감·의령현감 등을 지냈다. 의령현감으로 재직 시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祠)를 건립하였다. 1655년(효종 6) 종부시주부·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갔다. 1660년 (현종 1) 영월군수가 되어 ≪노릉지 魯陵誌≫를 편찬하고,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였다. 1665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오르지 않았다. 그 뒤 사직서령·세자익위사익위·군자감정·예빈시정·상의원정 등을 지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학자로서 이이(李珥)의 ≪증손여씨향약 增損呂氏鄕約≫과 주희의 ≪가례≫에 의거해 매년 한 차례씩 모든 종인(宗人)이 함께 모여 조상을 받들고 자제를 교육시키는 종약을 제정해 실천하였다.
강항을 위해 <강감회요서 綱鑑會要序>·<수은강공행장 睡隱姜公行狀>을 저술하고, 강항이 포로 생활중 견문한 것을 기록한 책인 ≪간양록 看羊錄≫ 등을 편찬해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해 ≪노릉지 魯陵志≫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사회 질서인 군신 관계를 전제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찬선(贊善)에 추증되었다.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 영광의 용계사(龍溪祠), 금구의 구성서원(九成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동토집≫·≪노릉지≫가 있다. 철원에 심원사취운당대사비(深源寺翠雲堂大師碑)의 글씨가 전한다.
3)윤원거(尹元擧, 1601∼1672)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백분(伯奮), 호는 용서(龍西). 시강원필선 전(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첨지중추부사 효지(曉之)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李睟光)의 칭찬을 받았다. 가정에서 학문을 익힌 뒤 1625년(인조 3)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전습하였다.
1633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해 1635년 성균관재생으로 들어갔다. 이 때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운동에 참여하여 그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했으나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뒤에는 일절 국사를 논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58년(효종 9)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공조좌랑·정랑·종부시주부·성균관사업·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 복제예송(服制禮訟)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송시열(宋時烈) 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70년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였다. 그 요지는 솔선수범·입지·정심(正心)·면학·휼민(恤民)·근검절약·무사봉공 등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청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산(尼山)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문거(文擧)·선거(宣擧)·순거(舜擧) 등의 종형제와 학문을 연마하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특히 시율에 격조가 높았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문집 ≪용서문집 龍西文集≫과 부록 합 4권 2책이 전한다.
4)윤문거(尹文擧, 1606∼167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망(汝望), 호는 석호(石湖). 아버지는 대사간 황(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혼(渾)의 딸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익(趙翼)·김상헌(金尙憲) 등에게도 배웠다. 1630년(인조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주서·시강원설서,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제천현감·춘추관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원정언으로 척화의(斥和議)를 진계(陳啓)하였고, 그해 12월 청나라가 침입하자 아버지를 따라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호조참의·경주목사·홍문관부제학·대사헌·이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는 ≪근사록 近思錄≫과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등을 가까이 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호유고≫ 3권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