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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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돈암서원(遯巖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
   김장생(金長生) 김 집(金 集)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1634년(인조 12)
   1659년(효종 10)
   2월, 8월 중정(中丁)
   사적 제383호(1993.10.18지정) 응도당(凝道堂)-보물 제1569호(2008.07.10지정) 유경사(惟敬祠)-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55호 (2000.01.11지정)돈암서원원정비(遯岩書院院庭碑)-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2000.01.11)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이 타계한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 충청남도 연산면 임리 249번지에 창건되었으며 1659년(효종 10) 사액되었다. 창건 시 김장생(金長生)을 주향으로 설정하였으며 1658년(효종 9) 김집(金集)을 추배하였고 1699(숙종 1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하였다.
본 서원은 김장생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현재의 연산면 임리(숲말)에 소재하였는데 서원 서북쪽에 ‘돈암(遯巖)’이란 큰 바위가 있어 서원의 이름을 돈암서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871년(고종 8)의 전국적 서원훼철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 숲 말의 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조금 높은 지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처음 서원의 창건 발의가 나온 것은 김장생 타계 직후였다. 1632년(인조 10) 여러 유사(有司)가 주도하고 20여 충청지방 내 각 지역 사족들이 호응하여 창건을 정식으로 발의하였다. 발의에 참여한 출문(出門) 유사들의 면면을 보면 현직관료 6인, 전직 관료 9인, 유학(幼學) 4인, 생원 4인으로 이들이 서원 창건의 실무진이었다. 그리고 열읍(列邑)이 유사들은 재원을 조달하였고 그밖에 공주목, 청주목, 홍주목 산하의 20여 지방 유림들이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본 서원은 효종 10년에 이어 1660년(현종 1) 재차 사액을 받았다. 사액을 두 번 받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과 1년 만에 동일 액호(額號)로 재사액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돈암서원은 호서는 물론 기호 전체에서 존숭 받는 서원으로서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았다. 공주 충현서원이 공주 일원의 수선지지(首善之地), 즉 공주 사림을 움직이는 좌장 격이었다면 돈암서원은 그 영향력의 범위가 더 넓어 호서 전체 나아가 호남까지 미쳤다. 또 돈암서원의 유생 도기(到記) 등을 보면 참석자들의 면면을 통해 돈암서원의 세력 범위를 유추할 수 있는데 대략 호서 남부 및 전북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는 이 일대가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호서사림의 실질적인 세력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김장생은 기호사림의 적통이자 당대 최고의 산림으로 존숭 받았으며 그를 제향한 대표적 제향처가 돈암서원이었으므로 돈암서원은 기호사림 전체의 구심체가 되었다. 훗날 화양서원이 등장할 때까지 돈암서원은 기호사람의 중심축이었으며 기호계 서원의 수선지지로서 사론을 형성하고 공론을 주도하는 역사적 소임을 감당하였다.

1)주벽-김장생(金長生, 1548~1631)
중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는 호는 사계(沙溪)이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송익필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예학에 정통하여 우리나라 예학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 경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서 영향력이 매우 컸다. 향리인 연산에서 주로 학문과 교육으로 많은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돈암서원은 고정산 줄기가 이어지는 중간쯤 위치해있다. 앞으로는 들을 가로질러 연산천이 흐르고 뒤로는 고정산 줄기가 형성하는 배산임수 형국을 하고 있다. 평지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하였으나 전면에 위치한 강당이 중심축에 놓이지 않고 약간 서측으로 비켜 직각배치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묘당공간은 제일 북편에 사괴석 담으로 둘러두고 전면의 강학공간은 응도당(凝道堂)을 비롯하여 양성당(養成堂), 정의당(正義堂), 장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학공간의 동측에는 앞에 수직사 공간을 두고, 뒤에 사마재를 두고 있다.
돈암서원은 평지에 위치함으로써 건물배치는 여유 있게 했으나 다른 측면으로 보면 배치의 질서가 조금 산만한 듯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유경사(惟敬祠)-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55호(2000.01.11지정)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면열은 퇴칸이고 우면 2열은 내부공간을 꾸며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당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공포의 짜임새가 큰 건물 못지않다. 그것은 처마의 높이를 기둥으로 해결하지 않고 구조적인 아름다움으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당에서처럼 작은 규모에서 첨차를 2중으로 올린 공포는 흔치 않다. 또한 세부적인 조각에도 장식성이 강한 요소들을 응용하는 것은 사당의 위계를 높이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2)응도당(凝道堂)-보물 제1569호(2008.07.10지정)
서원이나 향교에서 강학공간으로 사용하는 강당이 사당 방향과 직각으로 배치되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응도당(凝道堂)은 강학공간에서 전면에 직각방향으로 틀어져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후면 열 양측 면에는 문을 달아 마루방을 꾸몄는데 남측에 2칸, 북측에 1칸을 두었다.
돈암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1880년 이건될 당시 응도당(凝道堂)은 구터에 남아 있다가 1971년 이건, 개와중에 “숭정 6년 계유(癸酉) ”명문이 있어 인조 11년(1633)의 초창기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돈암서원의 건물배치와 규모는 여러 기록에서 사계 김장생이 고례(古禮)를 이어받아 생전에 주자대전(朱子大典)을 고증하여 강경에 황산(죽림)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은 것이라고 한다(원정비문 참조).
조선후기 서원의 문화사적 성격 중 장수강학(藏修講學)의 강당(講堂)으로 보기 드물게 큰 규모와 옛 규제를 충실히 따른 건물로서 중요하다.
 
3)양성당(養成堂)
사당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는 양성재는 ‘거경재(居敬齋)’라고도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각 칸을 하나씩의 방으로 꾸미고 가운데 3칸 전면에는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깔고 후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양측면의 1칸통은 각각 큰 온돌방이다.
 
4)정의당(正義堂)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 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1고주 5량집 구조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바닥에는 전을 깔았다.

1)돈암서원원정비(遯岩書院院庭碑)-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2000.01.11)
돈암서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위패를 모신 사계 김장생의 행적 및 사원의 구조 등에 관해 적고 있다. 비는 높직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1699년(현종 10)에 세운 것이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몸 앞면에 전서체로 새긴 비의 제목은 김만기(金萬基)의 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