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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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효암서원(孝巖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산노리 22-5번지
   강응정(姜應貞) 김문기(金文起) 김성휘(金成輝) 양응춘(梁應春) 남 준(南 俊) 김필태(金必泰)
   1713년(숙종 39)에 이건재축
   
   3월, 9월 10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87호(1984.05.17지정)
원래는 은진현 동쪽으로 이십리 지점 갈마동(葛麻洞)에 갈산사로 있었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다. 본 서원은 기존의 관찬 사료에는 나와 있진 않으나 일제시대에 발간된

1)주벽-강응정(姜應貞,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공직(公直), 호는 중화재(中和齋).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의(毅)이다. 은진에 살면서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1470년(성종 1) 효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김용석(金用石)·신종호(申從濩)·박연(朴演)·손효조(孫孝祖)·정경조(鄭敬祖)·권주(權柱) 등과 함께 주자의 고사에 따라 향약을 만들고, ≪소학≫을 강론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소학계(小學契) 또는 효자계(孝子契)라 하였다. 부모의 병간호가 지극하였고, 죽은 뒤에는 여묘(廬墓)의 예를 다함으로써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은진 갈산사(葛山祠)에 제향되었다.
 
 2)김문기(金文起, 1399∼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 출신.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 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 : 閔伸·趙克寬·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 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3)김성휘(金成輝, 1535∼16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입부(立夫).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좌의정 국광(國光)의 4세손으로,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균(鈞)이며, 어머니는 담양국씨(潭陽鞠氏)로 봉훈랑(奉訓郎) 세인(世仁)의 딸이다. 가계는 당시 사회의 대표적인 훈벌가문(勳閥家門)이었지만, 유복자였던 만큼 매우 궁핍하여 학문의 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치산(治産)에 힘써 거만의 재부를 축적하여 당대의 거부가 되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부족한 군량미를 많이 보충해주어, 국가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어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4)양응춘(梁應春,?∼1592)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인경(仁卿), 호는 도곡(道谷). 아버지는 주부 충백(忠伯)이다. 온양현감(溫陽縣監)으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의 탈환전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이어서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왜적을 베고, 조헌과 함께 진지에서 전사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은진의 갈산사(葛山祠)에 제향되었다.
 
5)남준(南俊) 남준의 호는 매계(梅溪)이고 본관은 의령이다. 호서 출신 거유 조헌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과 함께 왜적을 막을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다. 금산 전투에서 용전하다가 조헌과 함께 전사했다.
 
6)김필태(金必泰) 김필태의 자는 대래(大來)이고, 호는 둔암(屯菴)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평소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상을 맞아 정성을 다하였다.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던 중 도백(道伯)이 조정에 천거하여 참봉직(參奉職)을 제수 받았고 을사년에 사헌부 감찰(監察)과 영릉(永陵) 령(令)을 지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구릉지에 갈마산을 배산으로 서남향인 인좌신향(寅坐申向)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금은 외삼문 앞에 동측으로 비켜서 중화재(中和齋) 강응정(姜應貞)의 정려가 있고 서원은 크게 2개의 공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강학공간으로 사용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사당이 있는 묘당공간이다. 강학공간에는 강당과 재실이 있어야 하나 현재는 건물 없이 빈 공간이다. 배치형태는 전면에 강당은 없지만 강학공간을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식 배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