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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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휴정서원(休亭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36번지
   송익필(宋翼弼) 김공휘(金公輝) 김 호(金 灝) 이항길(李恒吉) 유 무(柳 懋) 유문원(柳文遠) 김정망(金廷望) 권 수(權 遂) 김상연(金尙埏) 김진일(金鎭一) 김우택(金禹澤)
   1699년(숙종 25)
   
   (음력) 3월, 9월 20일
   논산시향토유적 제16호(1992.10.28제정)
본 서원은 1699년(숙종 25) 연산에 건립되었으며 유무(柳懋)를 주향으로 하고 유문원(柳文遠), 이항길(李恒吉), 김정망(金廷望), 권수(權遂) 등 4인을 추배(追配)하였다. 처음에는 유무만을 독향(獨享)했으나 뒤이어 유문원을 추배했으며 다시 1735년(영조 11)에는 이항길을, 1751에는 김정망과 권수를 추배하였다. 1871년 전국적인 서원훼철령으로 본 서원도 철폐되었으며 1919년 일제 때 복원되었다. 그 후 탑정 저수지가 완성되면서 집수(集水)로 서원이 수몰되자 1944년 현재의 위치인 부적면 신풍리에 단소(壇所)를 설치하였다가 198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그런데 복건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제향 인물이 대대적으로 교체 내지 추향되었다. 복건 시 제향된 인물들을 보면 주향인 구봉 송익필을 비롯, 김공휘, 김호, 이항길, 유무, 김상연, 김진일, 김우택 등 8인이다. 처음 창건 시 주향이었던 유무와 이항길만 배향(配享)으로 살아남았고 유문원, 김정망, 권수는 밀려났으며 송익필 등 6인이 주향 등 상위급으로 입향(入享)된 것이다. 우선 전체적인 성격을 규정한다면 본 서원은 복건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광산김씨의 영향력 하에 들어간 듯하다. 추향된 6인을 비롯하여 제향 8인이 한결같이 김장생의 족친이거나 사우·문인에 속하기 때문이다. 연산은 호서 지방의 대표적 서원인 돈암서원이 있는 곳이며 기호학파의 대종사 김장생을 제향한 돈암서원이 엄존하고 있는데 다시 그의 친족·문인들로 구성된 휴정서원이 세워진 것은 돈암서원에 대한 수호적 성격을 가지며 아울러 기호사림 내에서 연산의 위상을 제고시켜 주는데 일조하였다고 하겠다.

1)주벽-송익필(宋翼弼, 1534~1599) 조선조의 학자, 문신으로 자는 운장(雲長)이고 호는 구봉(龜峰)이며, 본관은 여산이다. 경기도 파주 교하 구봉산(현재 파주 교하읍 심학산 아래에서 생활, 현재 교하읍 산남리이다.) 하에서 출생하고 면천(沔川)에 거주하였으며 이이, 성혼과 가까이 교제하였다. 성리학에 통달하였고 특히 문장에 능하여 당대의 8문장가에 속하였다. 시에도 이름이 있었으며, 문하에서 김장생, 정엽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특히 김장생은 스승인 송익필의 예학을 계승하여 훗날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2)김공휘(金公輝, 1550∼1615) 자는 경명(景明)이고 호는 이력(履歷)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김계휘(金繼輝)의 아우이며 김장생의 숙부가 된다. 파주목사를 지냈고 이이와 성혼 양인에게 경서와 예학을 강구하였다. 윤근수, 이정구, 김상용, 김상헌 등 당대의 명신들과 친하게 지냈다. 선조 23년 정여립이 난을 일으키자 부원수로 종군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숙종 33년 본 서원에 제향되었다. 3)김호(金灝) 김호의 자는 지언(止彦)이고, 호는 화양당(華陽堂)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지방 군수를 역임하였다. 향리에서 학문에 열중하면서 매번 제사지낼 때마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찬물로 목욕하였고 살림이 가난할지라도 제물은 정성껏 차렸다한다. 평소에 김장생, 김집으로부터 기절이 높은 선비라고 칭찬을 받았다 한다. 정묘호란이 일어나 스승인 김장생이 호소사(號召使)로 종사하자 스승을 따라 종군했으며 난이 끝난 후 김장생이 김호의 충절을 장계하여 군기시 부정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숙종 33년 본 서원에 제향되었다. 4)이항길(李恒吉) 자는 자구이고, 호는 과암(果菴)이며 본관은 전의이다. 김장생 이웃에 살며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였으므로 송시열과 송준길, 유계 등이 스승을 찾아 공부하러 올 때면 먼저 이항길을 찾아 선생의 안부를 물었다 한다. 이항길은 80노친을 효성을 다해 섬겼으며 김장생이 그의 학행과 행동을 늘 칭찬하였다. 정묘호란 때 김장생이 호소사로 종군하자 스승을 따라 나섰으며 적을 토평(討平)한 후 김장생이 이항길의 충의를 장계하여 참봉을 제수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숙종 33년 본서원에 제향되었다. 4)유무(柳懋) 유무의 자는 면지(勉之)이고, 호는 휴계(休溪)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김장생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병자호란 이후 관직에의 미련을 버린 채 연산에 칩거하였다. 수차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가지 않다가 잠시 찰방에 봉직한 후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5)유문원(柳文遠) 유문원은 본관이 문화(文化)로서 위 유무의 종질이며 김장생의 문인이다. 연산현에는 연산을 대표하는 사족이자 김장생의 사우·문인에 드는 가문으로서 광산김씨·전의이씨·문화유씨·여흥민씨·청주한씨 등이 있었는데 유문원의 집안도 그 중에 속하였다. 유문원이 가학(家學)을 통해 김장생의 학연을 받았지만 그의 숙부인 유제민, 유정민 등도 모두 김장생의 문인록에 올라 있어 문화유씨 일족이 연산 지방의 유력한 사족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6)김정망(金廷望) 김정망의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김장생의 문인이자 친족이며 현감을 역임하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김정망은 처음 서원 창건 시는 제향되었는데 복건 되면서 위패가 누락되고 대신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 그것이 단순히 이중 제향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김정망의 개인 행적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7)권수(權遂) 권수는 호가 반곡(盤谷)이며 본관이 안동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일부 자료에는 감사를 역임했다고 하였는데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광산김씨 텃밭에서 안동권씨인 권수가 제향된 것으로 보아 부적면 일대에 안동권씨 일족이 살지 않았나 추정된다. 근대에 들어와 서원이 복건되면서 권수가 제향인 명부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아 안동권씨의 가세가 쇠약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8)김상연(金尙埏 : 1689~1774) 김상연의 자는 여화(汝和)이고, 호는 기기재(棄棄齋)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광성군 김경광의 후손으로 중국의 한나라 엄평군의 “나도 세상을 버리고 세상 또한 나를 버렸다”는 뜻을 취하여 기기재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예학에 힘썼으며 특히 시를 잘 지었다.

건물은 4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사우는 8.2평, 동재 자리에는 8평짜리 도현각(道賢閣)이 있었고, 내삼문, 외삼문은 각각 4평씩으로 되어있다. 내삼문 안에는 1944년 설치된 단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