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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서익(徐益, 1542∼158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진사 진남(震男)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직제학 약해(若海)의 딸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병조·이조좌랑, 교리,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서천군수·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의주에서는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으며, 돌아와서는 12책(策)을 올리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은진(恩津)의 갈산서원(葛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만죽헌집 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2)이소(李韶, 1564~1646)
이소의 자는 광구(光九), 호는 도애(挑崖)이며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주계군(朱溪君)과 이소재(李素齋)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결백하였다.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도덕군자(道德君子)’라 칭송받았으며 우계 성혼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에 정치가 문란함을 못 마땅히 여겨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장차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저서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인조반정 후 그의 청백과 충직이 알려져 이조참의와 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내려 3차례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결국 외직인 은진현감으로 취임하였다. 은진 현감으로 봉임한 지 8개월 만에 고을 인심이 순화되고 치적이 현저하였으며 현정(縣政)이 읍민들에게 감화를 주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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