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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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행림서원(杏林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394번지
   서 익(徐 益) 이 소(李 韶)
   1856년(철종 4)
   
   3월, 9월 30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76호(1984.05.17지정)
본 서원은 서익(徐益)을 주향하고 이소(李韶)를 제향한 곳인데 처음부터 어떤 유서(由緖)를 가지고 창건된 것이 아니고 효암서원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서원 앞에는 서익의 묘정비(廟庭碑)가 서있고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옥적(玉笛)은 종가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서원 앞에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로 인해 행림서원이라 했다 한다. 대원군 때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으나 1926년에 복설되었으며 1976년 이소를 추배하였다. 행림서원의 창건 연대는 정확치 않다. 서원 측은 서원지(書院誌)를 근거로 1856년(철종 4)으로 보고 있으나 근래 나온 모든자료들은 대부분 1867년(고종 4)으로 적고 있다. 서원 측의 주장은

1)주벽-서익(徐益, 1542∼158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진사 진남(震男)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직제학 약해(若海)의 딸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병조·이조좌랑, 교리,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서천군수·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의주에서는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으며, 돌아와서는 12책(策)을 올리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은진(恩津)의 갈산서원(葛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만죽헌집 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2)이소(李韶, 1564~1646) 이소의 자는 광구(光九), 호는 도애(挑崖)이며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주계군(朱溪君)과 이소재(李素齋)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결백하였다.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도덕군자(道德君子)’라 칭송받았으며 우계 성혼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에 정치가 문란함을 못 마땅히 여겨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장차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저서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인조반정 후 그의 청백과 충직이 알려져 이조참의와 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내려 3차례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결국 외직인 은진현감으로 취임하였다. 은진 현감으로 봉임한 지 8개월 만에 고을 인심이 순화되고 치적이 현저하였으며 현정(縣政)이 읍민들에게 감화를 주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대지에 2개의 큰 공간으로 조성하여 전면에 강학공간인 강륜당을 두고 후면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식 배치이다. 강륜당과 사당을 일직선에 두고 강륜당은 서측에 직각으로 돌려 동향으로 배치하였다. 입지조건에 따라 서향에 가까운 을좌신향(乙坐辛向)이다. 이러한 직각 배치는 돈암서원과 합호서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서원에는 사묘를 비롯하여 강학공간인 강륜당·외삼문·묘문이 있다.
서익선생의 묘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