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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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암서원(花巖書院)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산27-1
   이지함(李之菡) 이산보(李山甫) 이몽규(李夢奎) 이정암(李廷馣) 구계우(具繼禹)
   1610년(광해군 2)
   1686년(숙종 12)
   2월, 8월 중정일(中丁日)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38호(1984.05.17지정)
화암서원은 조선시대 1610년(광해군 2)에 창건을 하고 1686년(숙종 12)에 사액이 내려진 서원이다. 한산이씨인 이색(李穡)의 후손 이지함(李之菡), 이산보(李山甫)와 경주 이씨 이몽규(李夢奎) 등 세분을 봉안하였다. 그 후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것을 1920년 토정 이지함의 후손들이 다시 건립하였으나 다시 그 지역이 청주저수지 시공에 따라 수몰지역이 되므로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처음에는 이지함, 이산보, 이몽규 세분을 봉안하다가 이정암(李廷馣)을 추가로 배향하고 최근에는 구계우(具繼禹)를 다시 추가배향하여 5위를 봉안하고 있다. 그 후에 축대와 기단(基壇)을 정비(整備)하고, 재실(齋室)과 삼문(三門)을 보수(補修)하였고, 1988년 강륜당(講倫堂)을 건립 하였다. 충효교실운영(忠孝敎室運營), 서원(書院)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7년 평문(平門) 외삼문(外三門)을 솟을 형식으로 개축, 서원(書院)의 면모(面貌)를 갖추었다. 1998년 토정후손(土亭後孫)들이 이지함선생(李之菡先生)의 영정(影幀)을 제작, 표준영정(標準影幀)으로 심의받아 봉안(奉安)하고 있으며, 매년 춘추 2월, 8월 중정일(中丁日)로 제향(祭享)하고 있다.

1)주벽-이지함(李之菡, 1517∼1578) 조선 중기의 학자·기인(奇人), ≪토정비결 土亭秘訣≫의 저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이며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이다. 색(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후일에 그가 수리(數理)·의학·복서(卜筮)·천문·지리·음양·술서(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573년(선조 6)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현감이 되었고, 재직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굶주린 사람)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일 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가 심해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 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어서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1713년(숙종 39)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2)이산보(李山甫, 1539∼159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증 영의정 색(穡)의 7대손이며, 장윤(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穉)이고, 아버지는 지무(之茂)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작은아버지인 지함(之菡)을 사사하였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를 거쳐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의 추천으로 춘추관에 들어갔다. 그 뒤 전적(典籍)·해미현감·정언(正言) 등을 지냈으며, 왕명을 받고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北道)를 순찰하고 돌아와 수찬(修撰)·교리(校理)·지평(持平)·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양모의 상을 당해 관직을 사직하고 서천에 돌아갔다가 다시 사인·집의·사간·응교·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당론을 끝까지 진술하다가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종부시정에 좌천되었다. 1년 뒤 다시 집의로 전임했고, 이어 동부승지·대사간·우승지를 지냈다. 1585년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이 이이(李珥)·정철(鄭澈)을 논박하자 이에 반박해 선조로부터 충절이 있다는 칭찬을 받고 대사헌으로 특진하였다. 뒤에 이이·박순(朴淳)·정철의 공적을 논하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경상도와 황해도의 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의 자리에서 난국을 수습하고, 이듬 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591년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건저문제(建儲問題 : 왕세자의 책봉 문제)로 정철 등 서인이 화를 당하자 이에 연루, 곧 파직되어 고향인 보령에 내려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했고, 대사간·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요양(遼陽)에 머물면서 진군하지 않자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설득해 명군을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북도와 삼남지방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 나가, 지난날의 선정에 감복한 도민들의 적극 협조로 무사히 해결하였다. 1594년 대기근이 들자 동궁의 명을 받고 밤낮으로 구휼에 힘쓰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해 이해득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시정에는 심신을 다했다 한다. 보령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3)이몽규(李夢奎, 1510~1563) 본관은 경주, 호는 천휴당(天休堂)으로 서울 관악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성무로 판관을 지냈으며 부는 인신으로 주부를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3살 때 박상의 문하로 들어갔으며 약관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시국을 간파하여 더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1547년(명종 2) 보령에 은거하면서 천휴당이란 집을 짓고 글을 읽고 소요하였으며 또한 산천을 유함하며 선비의 도에 섰었다. 그가 성균관에 가서는 여러 선비들로부터 중망을 받았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여러 사람의 경앙의 대상이었다. 4)이정암(李廷馣, 1541~1600)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유재(四留齋)이다. 1558년(명종 13)에 진사에 오르고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급제 승무원에 등용되어 정자가 되고 주서를 거쳐 1578년(선조 11) 양주목사로 나가 향교와 도봉서원을 중수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크게 치적을 쌓았다. 그 후 장령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고 개성에 이르러 동생 이정번과 함께 남아서 수비하다가 개성이 함락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활약했다. 그 공으로 초토사에 임명되고 왜군 3000여명을 대파했다. 그 후 공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에 전라도 관찰사로 전직 1596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황해도 초토사로서 연안을 수비하고 난리가 끝나자 사직하고 풍덕으로 은퇴했다. 1604년 연안을 수비한 공으로 선무공신 2등으로 월천부원군에 추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5)구계우(具繼禹, 1558~1620) 본관은 능성이고 호는 수암(睡庵)이다. 1558년(명종 1)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대인이 될 기질이 있어 토정 이지함도 그를 가리켜 대인의 기상이라 하였고 명곡 이산보도 나의 사표라 칭찬하였다. 그는 자라면서 더욱 학문의 길에 매진하며 후학을 교도하는 데 여생을 보낼 뿐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화암서원의 창건을 주창한 학자다.

구릉지에 횡으로 길게 배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릉지에 배치할 경우 모든 건물이 구릉을 따라 올라가면서 종방향으로 배치되는데 화암서원에서는 조금 다르다. 즉 급한 계단을 올라가 전면에 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작은 중정이 있고 중정 북편에 또 하나의 단을 조성하여 사당을 배치한 묘당공간을 두고 있는 것이다. 중정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였다. 화암서원은 강당이 서쪽 끝으로 가고 그 사이(서재와 강당사이)에 수직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다른 서원과 다르다. 전체적으로는 상단과 하단을 조성하여 후면인 상단에 사당이 있고, 전면인 하단에 그 밖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서 양재가 묘당 앞에 있어 기본적으로 전학후묘식 배치이지만 강당이 서측으로 멀리 떨어져 보기에 따라서 좌묘우학식(左廟右學式 ) 배치로도 볼 수 있다.
1)1998년 토정후손(土亭後孫)들이 이지함선생(李之菡先生)의 영정(影幀)을 제작, 표준영정(標準影幀)으로 심의받아 봉안(奉安)하고 있다. 2) 화암서원선생안(1847년, 32cm×86cm) 이 선생안은 서원훼철 이전인 1847년 향사 시에 수정하여 작성한 것이다. 총 6장으로 각 면을 8행으로 구획하여 유사 김취성부터 장의 강한복까지 총 84인의 유사, 장의, 당장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3)화암서원유허비 화암서원 정면 좌측에 있으며 1914년에 보령군수 김완진이 세운 비이다. 비에는 화암서원의 간략한 연혁과 그 유허지마저 잊혀져 감을 아쉬워하며 비를 세었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