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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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낭산서원(朗山書院)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수고 1리
   조응록(趙應祿) 조방직(趙邦直) 조광형(趙光亨)
   1742년 (영조18)
   
   3월 10일
   
낭산서원은 1742년(壬戌)에 향사(鄕士)의 공론으로 사랑강(沙朗江: 현 부여군 세도면 사산리)가에 낙수 조광형(樂叟 趙光亨)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낭호향현사(朗湖鄕賢祠)”라 편액(扁額)하고 춘추로 향사(享祀)를 지냈다. 이어 백년이 지난 뒤 1856년(丙辰) 가을에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많은 선비들이 모두 모여 의논(議論)하기를 “낙수(樂叟) 선생의 학문은 연원(淵源)이 실제 가학(家學)에서 나왔는데도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인 죽계(竹溪), 수죽(脩竹) 2대를 배향(配享)하지 않으니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2대의 장구(杖屨)가 아름답게 남아있고 의리(衣履)가 길이 감추어진 것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어찌 이 사당에서 숭상(崇尙)하고 향사(享祀)를 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각 원(院)에 질정(質正)하고 산장(山丈)에 품의(稟議)하니 공론(公論)으로 일치되어 다음해인 1857년(丁巳) 봄에 죽계 조응록(竹溪 趙應祿), 수죽 조방직(脩竹 趙邦直) 두 선생을 제유(躋侑)하여 조씨 가문의 세덕사(世德祠)가 성대해졌다. 다음해에 금천동(金川洞: 現 夫餘郡 世道面 水古里)으로 이건(移建)하였고 “낭산서원(朗山書院)”으로 개칭(改稱)하니 이는 “낭호향현사(朗湖鄕賢祠)”에서 연유한 명칭이다.

1) 조응록(趙應祿, 1538~1623) 조선의 문신(文臣), 자(字)는 경수(景綏), 호(號)는 죽계(竹溪),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부친(父親)은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덕기(德期)이고 모친은 증정(贈貞夫人) 진주강씨(晉州姜氏)이며 회양부사(淮陽府使) 조신(趙愼)의 6대손이다. 1573년(선조 6)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79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직강(直講) 전중어사(殿中御史), 호조(戶曹), 공조(工曹)의 정랑(正郞), 봉상사(奉常事)의 첨정(僉正)을 역임하였고, 흡곡(歙谷), 우봉(牛峯), 풍덕(豐德) 세 고을의 “원”으로 나가 치적(治績)이 깊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대왕이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니 전국이 흔들렸는데 공(公)은 밤을 낮삼아 의주로 달려가서 상감께 문안드렸다. 그때에 광해군이 세자(世子)로 묘사(廟舍)를 모시고 분조(分朝)하였는데 공(公)은 사어(司禦)로 임명되어 종묘(宗廟)를 지켜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겨 무군사랑청(撫軍司郞廳)을 겸임하여 지휘하고 분부(分付)했다가 난(亂)이 평정된 뒤에 통정(通政)에 승진되었다. 1618년(광해군10)에 모후(母后: 仁穆大妃 金氏)를 폐위(廢位)하려는 의론이 일자 간당(奸黨)들이 백료(百僚)를 협박했지만 공(公)은 항언(抗言)으로 굽히지 않고 절개(節介)를 세웠다. 이 때 광해군이 노(怒)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방출(放出)하자 임천(林川)의 전사(田舍)로 돌아왔다. 사직(社稷)을 호위한 공으로 풍녕군(豐寧君)에 봉해졌다. 1623년(인조원년) 반정(反正)에 훈명(勳名)이 관례(慣例)대로 삭제되었다가 뒤에 급첩(給牒)되었고 자손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에 “죽계유고(竹溪遺稿)와 “죽계일기(竹溪日記)”가 있다. 2) 조방직(趙邦直, 1574~1637) 조선의 문신(文臣), 학자(學者), 자(字)는 숙청(叔淸), 관향은 풍양(豊壤)이다. 죽계 조응록(竹溪 趙應祿)의 아들로서 약포 이해수(藥圃 李海壽)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약포(藥圃)의 기대가 너무 컸으므로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하(門下)에 가서 성리서(性理書)를 갖추어 배웠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 문과에 으뜸으로 발탁되니 고관(考官)이었던 서경 유근(西坰 柳根),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 등이 그 문장을 감탄하여 “이는 문형(文衡: 大提學)의 재목이다”라고 하였다. 괴원(槐院: 承文院)에 선입(選入)되어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가지 일을 대행(代行)하다가 유희분(柳希奮)에게 삭출(削黜)되어 벽사(碧紗)의 찰방(察訪)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전중(殿中)에 이직(移職)되었고, 1614년(광해군 6)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천거(薦擧)되었으나 권병(權柄)을 잡았던 사람에게 거슬리어 곧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이임(移任)시켜 서전(西銓: 兵曹)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1615년(광해군 7)에 함경도사(咸鏡都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체임(遞任)을 사양했다. 1630년(인조 8)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승자(陞資)되었고, 우승지참병형양참의(右承旨參兵刑兩參議)에 옮겨졌다. 1632년(인조 10)에 봉양을 위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가 곧 바로 체직(遞職)되어 돌아와 은대(銀臺: 承政院)에 들어가 우승지(右承旨)로부터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저서에 “수죽유고(脩竹遺稿)”가 있다. 3) 조광형(趙光亨, 1606~1682) 자(字)는 군실(君實), 호(號)는 낙수(樂叟), 본관은 풍양(豐壤)으로 수죽 조방직(脩竹 趙邦直)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준결(峻潔)하고 기우(器宇)가 염목(恬穆)하고 간정(簡淨)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사모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귀중한 그릇이라 칭찬했다. 계곡 장유(溪谷 張維)가 그의 문장을 살펴보고는 매양 칭찬을 더 하고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써 허여(許與)했으며, 시율(詩律)에는 명성(名聲)이 멀리 퍼져 나갔다. 오직 문사(文詞)를 매우 완미하여 세상과 어긋나서 크고 작은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항상 “주자서(朱子書)”와 “퇴계집(退溪集)”을 좋아하였다. 조정(朝廷)에서 공(公)의 현명함을 듣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천거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후에도 여러번 불렀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1742년에 향사(鄕士)의 공론으로 사랑강(沙朗江) 가에 사당을 세우고 “낭호향현사(朗湖鄕賢祠)”라 편액(扁額)하고 춘추로 향사(享祀)하였으니 이는 현재 낭산서원(朗山書院)의 전신이다. 저서에 “낙수유고(樂叟遺稿)”가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와 강당(講堂), 고사(雇舍) 등이 있다. 강당은 유림의 회합 및 숙소로 사용하고 있고, 고사(雇舍)는 서원의 관리인이 기거하는 곳이다.
1) 묘정비(廟庭碑) 2) 죽계 조응록 영정(竹溪 趙應祿 影幀) 3) 서적류(書籍類) 수죽유고(脩竹遺稿), 죽계일기(竹溪日記), 죽계유고(竹溪遺稿), 낙수유고(樂叟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