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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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부산서원(浮山書院)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김 집(金 集) 이경여(李敬輿)
   1719년(숙종 45)
   1719년(숙종 45)
    9월 18일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 (1976.01.08지정) 부산서원 고문서-부여군향토유적 제68호(2004.12.22지정)
부산서원은 조선 인조·효종년간에 학계와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뜻으로, 1719년(숙종 45) 이 지역 유림들의 공론에 의해 창건된 서원이다. 본 서원은 창건된 바로 그 해에 국왕으로부터 ‘부산서원(浮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부산서원은 이후 수차에 걸쳐서 중수되면서 초창기의 서원의 창건정신을 면면히 이어왔다. 그러나 19세기말 대원군의 서원정리 정책이 강행될 때, 부산서원 역시 훼철되었다. 이후 부산서원의 복설운동은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즉 1974년에 부여, 논산, 공주, 청양 및 서울 등 각 지역의 유림들로 ‘부산서원 복설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듬해에는 유림들의 성금과 군비 보조로 삼문을 축조하고 설단(設壇) 하였으며, 1977년에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던 충의사(忠義祠) 건물을 본전(本殿) 건물로 이건하기로 결정했고, 1977년 12월 도비와 군비 그리고 일부는 후손 측의 부담으로 본전의 건축 공사를 준공하였다. 서원의 배향인물에 대한 향사는 매년 9월 18일 거행하고 있다.

1)주벽-김집(金集, 1574~1656)
조선중기의 문신·학자로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사계 김장생의 차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아버지 김장생의 문하에서 오직 성리학과 예학의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1610년 참봉이 되었으나 실직(實職)에는 나아가지 않았고, 1613년의 계축화옥에 서숙(庶叔)인 김경손·김평손 등이 연루됨에 따라 더욱 벼슬길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선영이 있는 연산에 내려와서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도덕 정치가 강조되고 산림을 중용하는 정치 기풍이 진작되었다. 이에 따라 김장생을 필두로 하여 산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김집 또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출사(出仕)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를 사헌부의 헌관으로 부르고자 하였으나 그가 부친의 편양(便養)을 위하여 한사코 사양하므로 지방관에 제수되었다. 부여는 김집이 지방관으로 출사한 최초의 부임지이다. 그러나 부임한지 4년 만에 신병으로 사임하였고 이후 임피현령에 제수되는 등 여러 관직이 주어졌으나 연로한 부친 간병을 위해 모두 사퇴하였으며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후에야 지평·집의 등을 수행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집은 향리에서 의병을 모아 천안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인조가 이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해산하고 홀로 상경하여 진위(進慰)하고 돌아왔다. 효종 초에 공조참의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가 이조판서에 등용된 것은 산림을 등용하여 북벌을 실현하고자 한 교종의 북벌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은 김자점 등을 축으로 하는 공서파(功西派)가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어서 재야의 기풍을 가지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청서파(淸西派) 계열의 산당(山黨)과는 정면으로 충돌되었다. 당시 김집은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산당의 거두로 추앙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김육(金堉)과 불화가 일어나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에 밀고한 사건이 있은 후에는 더욱 정계 진출의 뜻을 잃었다. 이후로는 조용히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특히 예서(禮書)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집 사후 사림(士林)들은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서원과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문묘(文廟) 및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저서로는

급한 구릉을 배경으로 하단에 서재를 배치하고, 구릉을 올라 대지를 조성한 다음 내삼문을 두고 묘당공간에 사묘를 배치해 두었다. 사묘 주위에는 담이 둘러져 있다.
지형조건이 평지에서 급한 경사로 이어지고, 묘당공간에 오르면 주변의 넓은 들과 백마강이 조망된다.
강학공간의 가장 중요한 건물인 강당은 없고 전면을 바라보고 서측에 서재만 있을 뿐이다. 서재주면은 밭으로 조성되어 서원으로서의 정연한 배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정연한 배치가 아니어서 언급하기 어렵지만 배치형태를 찾자면 ‘전학후묘’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서원에는 사묘, 서재, 내삼문이 있다.

1)부산서원 고문서-부여군향토유적 제68호(2004.12.22지정)
부산서원은 인조․효종년간에 학계와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김집과 이경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역유림들의 공론에 의해 창건된 서원이다. 이후 훼철된 서원의 복설을 위하여 1970년대 “부산서원 복설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삼문과 설단을 하였으며 1977년 충의사(忠義祠) 건물을 완성하였다. 서원이 훼철되면서 주로 18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고문서들은 전주이씨 문중에서 소장 중으로 창건당시 유사(有司)이상을 기록한 창건소 제명록, 서원임원명단, 규약, 서제의 유생명단, 전곡관계를 정리한 문서, 노비대장 등이 있다.
 
2)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1976.01.08지정)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백마강가 암벽에 새겨진 글씨. 효종 때 명신 이경여(李敬輿)가 1657년(효종 8)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에 관계된 정세의 득·실을 논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효종이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 중에 “경의 뜻이 타당하고 마땅하지만 진실로 마음이 아프나 뜻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늦다(誠以至痛在心 有日暮途遠意).”라는 구절이 있었다.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그 뜻을 기려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의 8자를 써서 아들 민서(敏敍)에게 전한 것을 손자 이명(頤命)이 1700년(숙종 26)에 이 암벽에 글씨 8자를 새기고 건물을 지었다.
이 정자의 이름을 대재각(大哉閣)이라 했는데, 이것은 이경여가 효종의 비답을 받았으므로 ≪상서 尙書≫의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大哉王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글씨의 필체가 힘차고 강건하여 금석문의 자료로도 좋을 뿐 아니라, 당시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내려와서도 북벌계획을 왕과 협의하고 토론하던 노재상의 굳은 정신이 담겨진 교훈적인 각서(刻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