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창열서원(彰烈書院)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 519
   윤 집(尹 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
   1717년(숙종 43)
   1721년(경종 1)
   춘추제향
   충청남도기념물 제22호(1979.12.19지정)
삼학사(三學士)라고 불리는 조선 중기 충신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우이다.
병자호란 때인 1636년(인조 14) 조선을 속국으로 하려는 모욕적인 문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을 살려 보내지 말자고 주장하였으나, 이듬해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모욕적인 화의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삼학사 세 분은 청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다. 청 태종이 직접 이들의 심문에 참가하여 설득과 회유를 하였으나 심한 고문을 견디면서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다가 결국 중국 심양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청 태종도 이들의 기개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후대인들도 이들을 삼학사라고 부르고 높은 충절과 고귀한 죽음을 기렸다.
1717년(숙종 43) 숙종이 온양에 행차하였을 때 충청도 유생 이덕함(李德涵) 등이 사우의 건립을 상소하니 숙종이 대의명분을 세우고 충절을 장려한다는 뜻으로 특별히 충청도 감사에게 명하여 윤집의 의관이 묻어있는 홍산에 사우를 건립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지방관과 충청도 유림들이 협력하여 경종 초에 건물을 완공하였다. 1721년(경종 1)에 창열사라고 사액을 받았다. 1759년(영조 45)에 서원을 중수하였는데 처음에는 김기활(金箕活)이 사림의 공의로 사전(祠田)을 매각하여 공역을 시작하였으나 1759년(영조 45) 봄에 사망하여 현민의 천거로 김기동(金箕東)이 맡아 마무리 지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충절인을 제향하는 곳이라 하여 온존되었다. 창열사(彰烈祠)는 1921년에 장의 김여재(金汝宰) 등이 재차 중수를 하였다.

1)주벽-윤집(尹集, 1606∼16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우신(又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리 섬(暹)이고,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남양부사 계(啓)의 아우이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공부해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 설서가 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교리(校理)에 오르고 헌납(獻納)을 역임한 뒤, 1636년 이조정랑·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오달제(吳達濟)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했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入對)해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해 사필(史筆)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진회(秦檜)와 같은 대간(大奸)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했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했으며, 국왕이 대간(臺諫)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 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해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청병이 오히려 감복해 존경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홍익한(洪翼漢)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처음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2)오달제(吳達濟, 1609∼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경민(景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문(希文)이고,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며, 어머니는 최형록(崔亨綠)의 딸이다.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병조좌랑·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이 때 후금이 세력을 날로 키우며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쳐 조선을 무섭게 위협해왔다. 이에 화친을 위해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해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자, 청나라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尹集)과 더불어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墨梅畵)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조속(趙涑)·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 화풍에 영향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림은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홍수주(洪受疇)·박동진(朴東晉)·조희룡(趙熙龍)·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3)홍익한(洪翼漢, 1586∼16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3학사(學士)의 한 사람이다. 찬성 숙(淑)의 현손이며, 관찰사 서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애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백부인 교위(校尉)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다.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1년(광해군 13) 알성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罷榜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함.)되었다.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사서(司書)를 거쳐, 1635년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제호(帝號)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상소하였다. 마침내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 난으로 두 아들과 사위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아내와 며느리도 적에게 붙들리자 자결하였다. 이 때문에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듬 해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청군(淸軍)의 화를 피해 평양부서윤으로 나갔다.
그러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그는 청장 용골대(龍骨大)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했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처형 장소나 매장처도 확실치 않아, 그가 평소에 타던 안마와 의금(衣衾)만을 수습해 경기도 평택 서쪽 경정리에 장사지냈다. 1653년 도승지가 추증되고, 1686년 이조판서와 충정(忠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 뒤 1705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경기도 평택시 팽성면 본정리로 이장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영천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 평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花浦集≫·≪북행록 北行錄≫·≪서정록 西征錄≫이 있다.

사당 건물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내삼문을 거쳐 아래로 내려가면 강당 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근래 지은 외삼문이 있다.

1)창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