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칠산서원(七山書院)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284
   유 계(兪 棨)
   1686년(숙종 12)
   1697년(숙종 23)
   음력 3월, 9월 중정(中丁)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2호(1984.05.17지정)
칠산서원은 시남 유계(市南 兪棨)를 독향한 서원이다. 칠산서원은 1686년(숙종 12)에 지방유림의 ‘유소(儒疏)’에 의하여 창건되어 유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유계를 제향하는 서원이 임천에 창건하게 된 이유는 유계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시강원설서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던 것이 배경이 되었다. 1696년(숙종 22)에 유계는 병자년의 척화신이었기 때문에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1697년(숙종 23) ‘대신연백(大臣筵白)’에 의하여 ‘칠산’이라 사액되었는데, 이때 사액은 1696년에 병자년의 척화신으로 추증되었던 것이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칠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와종부락에 복원되었다. 그 후 1966년 지방유림과 후손이 협력하여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383번지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였다.

1)주벽-유계(兪棨, 1607∼166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아버지는 참봉 양증(養曾)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병조참판 이신(以信)의 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정언·지평·수안 군수를 지낸 대경(大敬)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1630년(인조 8)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다.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서실(書室)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때 ≪가례집해 家禮集解≫를 개작하여 ≪가례원류 家禮源流≫를 저작하였다.
1644년 주서로 기용되어 1646년 무안 현감이 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 부교리로서 왕의 장례 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라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자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宗)’자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1652년(효종 3)에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송준길 등의 추천으로 시강원의 문학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1659년에 병조 참지로서 비변사 부제조를 겸임하고, 이어서 대사간·공조 참의·대사성·부제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 해에 효종이 죽고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 3년 설을 주장하는 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 등의 남인을 논박하여 유배 또는 좌천시켰다. 1662년(현종 3) 예문관 제학을 거쳐 1663년 대사헌·이조 참판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는 이이(李珥)와 김장생의 학통을 잇고, 예론의 입장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이이의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본받아 고금의 치도(治道)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피력한 ≪강거문답 江居問答≫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이이의 학설을 요약하여 “정치의 근본은 수기(修己)이고, 정치의 핵심은 임관(任官)이며, 정치의 급무는 구민(救民)이다”라고 보고 그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주자의 ≪가례≫의 본문을 기본으로 하고, ≪의례 儀禮≫·≪주례 周禮≫·≪대례 戴禮≫ 등 여러 경전의 내용을 뽑고 주를 붙여 그것을 ‘원(源)’이라 하고, 후대의 여러 유학자들의 예설을 조사하여 ‘유(流)’라 하여 역사상의 예설들을 밝힌 ≪가례원류≫를 편찬하였다. 이는 김장생의 예설에 토대를 둔 학설로서, 훗날 윤선거와 공편했는지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말년에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을 본받아 노론 정권하의 고려사에 대한 역사관을 대변해 주는 강목체(綱目體)의 ≪여사제강 麗史提綱≫을 편찬하였다.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시남집≫·≪가례원류≫·≪여사제강≫·≪강거문답≫ 등이 있다.

배치는 내삼문과 사묘가 중심축선상에 배치되고 그 주위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삼문 앞에는 동측으로 치우쳐 강당이 있고 서측에 장판각이 주위 담을 치지 않고 각각 사묘와 같은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좌향은 서남향이다. 내삼문 바로 앞 동측에 약간 치우쳐 신도비가 있다.
배치형태로 보아 전면에 강학공간이 있고 후면에 묘당이 있어 ‘전학후묘’식으로 보이지만 강학공간이 대칭의 중심에 배치되지 않고 동편에 치우쳐 있어 보기에 따라서 좌학우묘인 듯한 배치로도 보인다. 현재 서원에는 사묘, 강당, 장판각, 내삼문이 있다.

사우에는 유계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장판고에는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책판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