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성암서원(聖巖書院)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673-1
   유 숙(柳 淑) 김홍욱(金弘郁)
   1719(숙종 45)
   1721년(경종 1)
   2월, 8월 중정(中丁)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05호(1984.05.17지정)
성암서원은 고려후기 공민왕대의 문신 사암 유숙(思菴 柳淑)과 조선 중기 인조~효종대의 문신인 학주 김홍욱(鶴洲 金弘郁)을 배향한 서원으로, 1719(숙종 45)에 건립되고 2년 뒤인 1721년(경종 1)에 사액받았다. 이 서원에 대하여는

1)주벽-유숙(柳淑, 1324∼136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庵). 아버지는 태상경(太常卿) 성계(成桂)이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과거에 급제해 안동사록(安東司錄)이 되었으며, 이어 강릉대군(江陵大君 : 공민왕)을 시종해 4년간 원에 있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에 돌아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연경(燕京)에서 왕을 보좌한 공으로 연저수종(燕邸隨從) 1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어 우대언·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다가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무고로 파직되어 시골에 돌아가 있었다. 조일신이 죽은 뒤 다시 기용되어 1354년 우대언(右代言)·판전교(判典校)·판도판서(版圖判書)·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56년에는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가 되었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임명되었다. 1359년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있을 때 기철(奇轍) 일당을 잡아죽이는 데(1356년) 세운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으며,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올랐다.
그 해 겨울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에게 남행하도록 권하였다. 이어 한림학사 승지 동수국사(翰林學士承旨同修國史)를 역임했으나, 안우(安祐) 등의 위협으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나갔다. 1362년에는 지도첨의(知都僉議)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시중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1363년 홍건적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의 호를 받았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졌다. 또한 같은 해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변란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워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가 되어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에 올랐다.
1365년 그의 충직을 두려워하던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시골에 돌아가 있다가 영광에서 신돈이 보낸 자에게 교살당하였다. 1376년 11월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2)김홍욱(金弘郁, 1602∼165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 서울 출생. 연(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승지 호윤(好尹), 아버지는 찰방 적(積), 어머니는 화순최씨(和順崔氏)로 동지중추부사 원(遠)의 딸이다. 1623년(인조 즉위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파방되어 합격이 취소되고 재시험에서 합격했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뒤 설서(說書)를 겸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호종, 강경론을 주장했다. 당진현감으로 나가서는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뒤 다시 복관되어 대교(待敎)·전적·지평·부수찬·정언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1641년 수찬이 된 뒤 1644년 교리·헌납을 거쳐 1645년 이조좌랑이 되었는데, 권신 김자점(金自點)과 뜻이 맞지 않아 사직했다.
1648년 응교가 되어 관기(官紀)·전제(田制)·공물방납(貢物防納) 등 시폐(時弊) 15개조를 상소했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1650년(효종 1) 사인(舍人)이 된 뒤 집의·승지를 거쳐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가 되어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실시했다. 1654년 황해도관찰사 재임시 천재로 효종이 구언(求言)하자 8년 전 사사된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 昭顯世子의 嬪)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상소했다.
이른바 ‘강옥(姜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 보전과도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이 말을 꺼내자 격노한 효종에 의해 하옥되었고, 결국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그가 죽기 전 “언론을 가지고 살인해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한 말은 후세인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1718년(숙종 4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1년(경종 1) 서산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후손의 노력으로 연보 등이 추보(追補)된 ≪학주집 鶴洲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암서원은 외삼문을 들어서면 그 좌우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동·서 양재가 서로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고 여기에서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우측에는 성암서원중건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 계단을 올라 내삼문과 사괴석 담장으로 구획된 고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위치한다.
사당은 전면 반칸에 전퇴를 만든 후 그 내부에 우물마루를 깔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사당의 세부건축구조는 공포는 이익공계통이나 변형된 형식이고, 창방위에 운공이 끼워진 소루가 정면과 측면 간에 각 3구씩, 그리고 후면에는 운공없이 소루만이 4구씩 배치되어 주심도리를 받고 있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