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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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송곡서원(松谷書院)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정신보(鄭臣保) 정인경(鄭仁卿) 유방택(柳方澤) 윤 황(尹 璜) 유백유(柳伯濡) 유박순(柳泊淳) 유 윤(柳 潤) 김 적(金 積) 김위재(金偉材)
   1694년(숙종 20)
   
   음력 2월, 8월 중정(中丁)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07호(1984.05.17지정)
서산정씨 시조인 정신보(鄭臣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정신보는 원래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나라가 망하자 고려로 망명한 후 서산에 정착하여 살았다. 1694년(숙종 20)에 세운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해체되었다가 1910년 유양목 등 유림이 복원하였다.
이 서원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송곡서원에서는 정신보와 정인경(鄭仁卿), 유방택(柳方澤), 윤황(尹璜), 유백유(柳伯濡), 유박순(柳泊淳), 유윤(柳潤), 김적(金積), 김위재(金偉材)를 포함하여 총 9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주벽-정신보(鄭臣保)
서산정씨(瑞山鄭氏)의 시조(始祖)는 송(宋)나라에서 원외랑(員外郞)을 지낸 정신보(鄭臣保)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원래 중국(中國) 절강(浙江) 사람으로 증조부(曾祖父)인 응충(應冲)이 송(宋)나라에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아버지인 수거(秀琚)는 원외랑(員外郞)을 지냈다 한다. 송(宋)나라가 망(亡)하자 신보(臣保)가 바다를 건너 고려로 망명(亡命)하여 서산(瑞山)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게 된 것이 서산 정씨의 시초이다.
 
2)정인경(鄭仁卿, 1237∼1305)
고려의 문신. 본관은 서주(瑞州:지금의 서산). 인주(麟州:지금의 의주)의 수령을 지낸 신보(臣保)의 아들이다.
처음 몽고어통역관으로 출발하였으나 고종 말 몽고병의 침입 때 종군하여 야습으로 전공을 세워 제교(諸校)에 보임되었다.
1269년(원종 10) 세자(뒤의 충렬왕)가 원나라에 갈 때 시종하였고, 세자가 돌아오다가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林衍)의 변(變)을 고하는 자가 있으므로 인주의 수령으로 있던 아버지에게 이를 알려 세자를 다시 원나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 공으로 1274년(충렬왕 1)에 시종1등공신(侍從一等功臣:고려사 정인경열전에는 2등공신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세가의 기록을 따름.)에 올랐다. 또한 그 공으로 그의 고향인 부성현(富城縣)이 서산군(瑞山郡)으로 승격되었다.
1279년 장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일본원정준비에 홍다구(洪茶丘)가 간섭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고, 1282년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서 요동(遼東)·심양(瀋陽)에 가서 유민(流民)들을 추쇄(推刷)하여 왔으며, 이듬해 대장군으로 요양(遼陽)과 북경(北京)에 가서 유민들을 추쇄하여 왔고, 1288년에는 상장군에 올랐다.
1290년 동녕부(東寧府)를 고려에 귀속시키는 데 공을 세워 벼슬이 부지밀직(副知密直)에 오르고, 서북면도지휘사로서 서경유수가 되었다.
1292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나 나라에서 혼인을 금하는 기간을 설정하였는데 이를 어겨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
1299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중찬으로 치사하였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정직하고 몽고어에 능하여 통역관으로 이름이 알려져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 정동성이문관(武德將軍征東省理門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3)유방택(柳方澤, 1320-1402)
자는 윤보, 호는 금헌(琴軒)이다. 홍건적이 서울 강화 등에 침범하자 혼란 중에 국력(國曆)이 없어 공이 스스로 지은 역서를 강화병마사에게 주어 사용케 하였는데 난 후에 그 정밀함이 알려져 유명해졌다.
우리나라 옛 천문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국보 제228호다. 1467개의 별이 가로 1m, 세로 2m의 돌에 새겨진 이 천문도는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운 직후인 1395년에 만들어졌다. 이 천문도를 만든 이는 문집 <양촌집>을 지은 문필가 권근으로 알려져 왔지만, 고려 유신인 유방택이 실제 제작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유방택의 일생에 대해서는 고려 말 대표적 학자인 정이오의 문집 <교은집>에 실려 있는 ‘유방택 행장’이 거의 유일하다. 행장에는 이성계가 천문계산을 이룩한 공로를 인정해 유방택에게 개국일등공신을 주려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개성 취령산 아래 숨어 지냈다고 한다.
또 유방택은 죽는 날 두 아들에게 “나는 고려사람으로 개성에서 죽으니, 내 무덤을 봉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는 조선왕조가 시작되자 고향 서산으로 내려와 살면서 공주 동학사 삼은각을 짓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세 고려 충신들을 기렸다고도 한다.
4)윤황(尹璜)
윤황의 호는 후송(後松)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벽송거사(碧松居士) 윤위(尹威)의 오세손이다. 공조전서(工曹典書) 벼슬을 지냈으며 나라가 망하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5)유백유(柳伯濡,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1369년(공민왕 1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춘추관수찬으로서 박실(朴實)·김도(金濤) 등과 더불어 명나라 과거에 참여하였다. 우왕 때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가 되었다.
창왕 때 조준(趙浚)의 전제개혁안(田制改革案)이 주장되자 시중 이색(李穡)이 옛 법을 가벼이 고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하는 데 찬성하여 결국 신구(新舊)의 대립을 일으켰다.
1391년 (공양왕 3)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서 전제개혁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광주(光州)로 유배되었다가 조선왕조 개창 후 1407년(태종 7)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6)유박순(柳泊淳, ?∼142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 1406년(태종 6) 대사성이 된 뒤 1408년에는 생원시원(生員試員)이 되었다. 당시 태종이 시학자(侍學者:왕과 왕세자와 학문을 논하는 일을 맡은 사람)를 청하자, 유생 중에 이수(李隨)를 천거하였는데 당시 학문에 조예가 깊던 김과(金科)와 권근(權近) 등은 모두 여러 관직을 겸직하여 바빴던 관계로 그를 추천하였다. 그 뒤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지낸 뒤 인령부윤(仁寧府尹)이 되었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국학장관(國學長官)을 지냈다.
 
7)유윤(柳潤)
유윤(서산유씨의 무동처사(楙洞處士)공파의 파조, 1450년 세조의 부름에서 나온말)은 젊은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단종이 폐위되자 청주에 은거하며 자신의 학문에만 몰두했다. 심지어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자손들에게 벼슬에 나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후손들까지도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세조는 학덕이 깊었던 그를 조정으로 불러 나라 살림을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유윤은 자신을 찾아온 관원에게 살던 집 곁에 서 있는 모과나무를 그리고는 그 곁에 자신은 ‘이 모과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글을 써서 건네어 세조의 부름을 사양했다. 유윤의 그림을 받아든 세조는 그를 모과나무 무(楙)와 마을 동(洞)을 써서 ‘모과나무가 있는 마을에 사는 처사’라는 뜻으로 ‘무동처사(楙洞處士)’라 불렀다고 한다. 이 때가 1450년이었다. 서산유씨의 무동처사공파의 시조이다.
 
8)김적(金積, 1564-1646)
본관은 경주이며, 자(字)는 선여(善餘), 호는 단구자(丹邱子), 1564년(명종19) 증좌승지 호윤(好允)과 반남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어머니 박씨부인의 주선으로 이계(李 )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연안이씨 출신의 이계는 박씨부인의 외숙으로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후일 대문장가로 성장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아들이다. 이 과정에서 공은 외외종숙이며 동갑내기였던 월사와 숙식을 같이하며 학업에 열중했는데, 후일 월사가 공에게 출사를 종용하게 된 것도 혈연과 학연에 바탕한 세의와 관련이 깊다.
이후 성장하면서 시인이자 명필이며, 관료로 이름이 높았던 남창 김현성(金玄成)에게서 수학하여 사우관계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공은 과운이 따르지 않아 여러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다 1609년(광해군1) 4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입격했다. 이듬해인 1609년 안기도찰방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이이첨 등 대북정권이 대비를 유폐하면서 인심이 흉흉해지자 가족을 데리고 향리인 서산으로 낙향했다.
경주김씨는 상촌공 이래로 서울, 광주 등 근기지역에 거주하며 사환에 종사해 왔고, 분묘 또한 광주, 시흥, 고양 등 경기일원에 분포하였다. 서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단구자공의 조부인 김연(金堧) 때였다. 무과 출신으로 서흥현감 시절에는 임꺽정(林巨正)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김연은 벼슬이 안주목사에 이르렀고, 중년 이후 서산 대교촌(大橋村)에 복거하여 경주김씨 일문의 세거 기반을 마련하였다. 공의 솔가 낙향도 이런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서산에 낙향한 공은 선비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오로지 자녀교육과 가정경영에 주력하는 한편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심신의 수양처로 활용하였다.
성품이 소탈했던 공은 사람을 대함에 귀천이나 존비를 따지지 않고 항상 정성을 다하였는데, 자제 중에 공의 그러한 태도가 지나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도리어 공경으로서 사람을 대할 것을 거듭 가르쳤다.
공은 집 아래 장천 가에 돌출한 절벽을 단구(丹邱)라 이름하고는 소요처로 삼았는데, 마침내 이 곳 단구의 계류와 암석의 빼어남에 매료되어 단구자(丹邱子)로 자호하였다. 공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때를 만나면 가족과 친척, 인근의 선비, 고을 노인들과 함께 단구에서 회합하여 주연을 베풀고 화합을 다지기를 연례 행사로 삼아 덕인장자(德人長者)로 칭송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사인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출사의 기회가 주어졌고, 심지어 월사가 편지까지 보내 부임을 종용하였지만 공은 “어찌 백수의 나이에 소년들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치겠는가? 라고 하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공은 더욱 출입을 삼가하여 비록 고을원의 부름이 있어도 사양하였고, 관청을 드나드는 법이 없었다. 1646년(인조 24) 정월 16일 감기에 걸려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83세였다. 후일 학주공(鶴洲公)의 귀현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1797년 서산 송곡사(松谷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산소는 서산시 대산면 묵수지에 있다. 묘전에 조익(趙翼)이 찬하고, 학주공이 쓴 묘갈(墓碣)이 있다.

9)김위재(金偉材)
김운택의 아들로 호는 미암(迷庵)이며 신임사화 때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영조 때 사면되어 향리인 서산으로 귀환한 후 한강을 건너지 않고 학행이 뛰어나 감역과 부솔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다. 영조 말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 시대에 광산 김씨 일문은 주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노론 측에서 활동하고 영욕을 함께했다.

서원건물의 배치는 크게 나누어 강학공간인 동, 서재와 제향공간인 사우로 구분되었고 강학 건물에 삼문형식을 따르지 않은 대문이 함께 붙어 있어 ㄷ 자 평면을 이루었으며 본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를 통칸으로 구성하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1단의 장대석 기단위에 네모뿔형 주초석을 놓고 그위에 정방형기둥을 세우고 상부의 주두는 생략되었다. 가구는 평위에 대량과 종량을 걸은 이중량이며 종량 상부에 뜬 창방이 결구된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중도리와 함께 옥계하중을 받도록 되어 있고 홑처마 팔작지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