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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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정퇴서원(靜退書阮)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동포 맹희도,만전당 홍가신, 조상우(趙相禹)·강백년(姜栢年)·윤현(尹俔)·조이후(趙爾後)
   1634년(인조12)
   
   
   
아산시내에서 628번 도로를 따라 중리에 이르면, 금곡초등학교를 지나기 전에 비포장도로의 샛길이 있다. 이 길로 300m정도 들어가 골짜기 안쪽 끝에 정퇴서원의 터가 남아 있다.
본래 온양군 군내면 지역으로서 소일의 가운데 마을이 되므로 중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원리, 흑암리, 하리를 병합 하여 배방면에 편입되었으며, 중1리는 인조 12년(1634년)에 시암 조상우 선생이 설화산 동쪽 기슭에 정토서원을 창건하고, 정암 조광조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셔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지금 정퇴서원은 없어졌으나 "서원골" 이라는 마
을이 있다. 

현재 이곳은 수풀이 우거지고, 민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전언에 의하면 수년전 집을 지었다가 허물었던 적이 있다고 하여, 서원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1634년(인조12)에 창건된 정퇴서원은 원래 정암 조광조,퇴계 이황,동포 맹희도,만전당 홍가신을 향사하기 위한 서원이었다.
당시 정토서원의 창건은 시암 조상우가 주도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우산 안방준(1573~1654),포저 조익(1579~1655),잠야 박지계(1573~1635),창강 조속(1596~1668),후천 황종해(1579~1642),야곡 조극선(1595~1658)등을 들 수 있다.
창건통유문과 서원상량문은 조상우가 찬하였다.온주지에 실려 있는 조상우의 (정퇴서원) 창건 통유문에 의하면 온양군의 남쪽 5리쯤 되는 자하동의 아래에 정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 명칭이 정암과 퇴계의 머리글자와 같으니 ‘군자의 골’ 이라고 할만 하다고 하면서 두 선생의 도덕을 추앙하기 위해 서원을 세운다고 하였다. 정퇴는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 두 현인의 호를 합하여 부른 명칭이 된다. 마침 이 때는 전국적으로 동방 오현의 문묘종사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온양에서도 정암과 퇴계를 존숭하고 유학을 진흥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정퇴서원의 설립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설화산 기슭의 점토골은 조광조와 이황으로 대표되는 한국 유학의 발상지라는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온양에서 정퇴서원 설립을 주도했던 학자는 시암(時庵) 조상우(趙相禹)였다. 시암은 온양 매곡에서 출생하여 고향에서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학자였다. 

사계 김장생을 스승으로 섬겼던 그는 동춘 송준길, 포저 조익, 잠야 박지계, 신독재 김집, 후천 황종해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퇴서원 건립은 지역의 유학자들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지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퇴서원을 중심으로 한 온양의 유학 교육 발전은 아산의 교육 발전을 선도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배출 비율에서 온양은 충청도 54개 지역 중 2위를 차지했다. 신창현과 아산현이 각각 11위와 19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온양군이 아산 지역의 과거 합격을 선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산 지역의 과거 합격자는 16세기에는 25명에 불과했으나 17세기에는 63명, 18세기에는 72명, 19세기에는 111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를 보면 정퇴서원 건립을 전후한 17세기가 아산 출신의 인사들의 과거합격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다. 

정퇴서원 건립은 아산의 학술과 교육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산과 신창에서 활동했던 조익, 박지계 등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시암 조상우는 벼슬길을 거부하고 정퇴서원을 건립함으로써 향토의 학술문화를 진흥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온양을 중심으로 한 아산 지역의 유학 교육은 주로 조상우가 담당했다. 그는 17세기 아산 지역 유학 교육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만전 홍가신을 종향하는 이유로는 홍가신이 두 선생의 후학으로 두 선생의 도를 흠모하여 일생의 공정이 성,경 2자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광해군조에 치사하여 절조를 지켰고, 살던 지역이 비록 온양과 아산 두 고을의 사이라고는 하지만 전지는 주로 온양에 있었으며 유관하던 발자취는 자하동의 정퇴곡에 자주 미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전 홍가신의 정퇴서원 봉안제문은 후천 황종해가 찬하였다. 창건당시의 서원위치는 동포 맹희도가 서일위로 조광조,이황과 합사되었고(이상은 주향), 만전당 홍가신은 배향되었으며, 별도로 충효당이 정퇴서원의 옆에 세워져서 이순신과 창암 강봉수를 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정퇴서원의 건립을 주도했던 시암 조상우가 1692년에 추배되고, 설봉 강백년,매곡 조이후가 각각 1702년,1717년에 추배되었으며, 양심당 윤현이 1702년에 충효당에 추배되었다.
서원가고와 동국원우록에는 추배되는 조상우, 강백년, 윤현, 조이후가 이순신, 강봉수와 함께 모두 (충효사)에 별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정퇴서원사적과는 차이가 있다.
서원위치에 대해서도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맹희도가 배향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정퇴서원사적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아마 후에 위치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정퇴서원은 사액을 받지 못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1) 정암 조광조 : 용인 심곡서원조 참조

2) 퇴계 이황 : 안동 도산서원조 참조

3) 맹희도(孟希道)

생졸년 미상. 본관은 신창(新昌), 호는 동포(東浦).
아버지는 군수(郡守) 맹유(孟裕)이다. 고려 조에 한성윤(漢城尹), 전교부령(典校副令), 전교령(典校令)을 지내었고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에 이르렀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와 온양(溫陽)의 오봉산(五峰山)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이 때 벗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그의 고상한 뜻을 기려 시를 지어주었고, 후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이 시를 차운하여 맹희도의 10세손 시정(寺正) 맹세형(孟世衡)에게 준 시가 《청음집(淸陰集)》에 실려 있다. 효행이 있었는데, 거상(居喪)중에 흰제비[白燕]가 날아왔다고 한다. 공양왕 때와 조선 태조 조에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고, 1634년(인조 12)에 지방유림이 창건한 온양의 정퇴사(靜退祠)에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홍가신(洪可臣)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사당이 있는 정퇴서원(靜退書院)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고 현재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그 터만 남아 있다. 같은 마을에 있는 사적 제109호 아산맹씨행단(牙山孟氏杏壇)의 뒤편의 세덕사(世德祠)에 아버지 맹유와 아들 맹사성(孟思誠)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묘소(墓所)는 충남 아산시 온양면 법곡동 산-6에 있다.
4) 홍가신(洪可臣)

1541년(중종 36)∼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아버지는 홍온(洪昷)이며, 어머니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이 되었을 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되고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에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냈다 하여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때 파직당하였다가 1593년 파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하여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하여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강화부사‧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지내고,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寧原君)에 봉하여졌다. 광해군 초 장례원정‧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판서에 이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에서 죽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사문(師門)의 촉망을 받았으며, 체계있는 학문을 전수받아 문장으로서 조직적인 화실(華實)의 매력을 갖춘 외에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문(斯文)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기(理氣)의 본질을 우주의 본질로서 간파하여 기와 이로 보고, 기와 이의 순환과정에서 만물이 생성하며 음양으로 조화, 분리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동조하면서, 생사분리(生死分離)를 주장하는 노자철학과 인간생명을 허무적멸(虛無寂滅)로 떨어뜨리는 불교관을 배척하였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전집》과 《만전당만록》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5) 조상우(趙相禹)

1582년(선조 15) 10월 8일~1957년(효종 8) 2월 25일.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하경(夏卿)이고, 호는 시암(時庵)이며, 초명은 조학성(趙學聖)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출신지는 온양 매곡촌(溫陽 梅谷村)이다.
부친 조지유(趙之柔)와 모친 한적(韓積)의 딸 평산한씨(平山韓氏) 사이에서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강주(姜籒)의 딸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이시직(李時稷)‧황종해(黃宗海) 등과 교유하면서 도학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홍신민(洪信民)에게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향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부친의 병 때문에 복시에 응시하지 않았고, 1650년(효종 1)에도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괄의 난으로 파천한 인조를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알현하였는데 적을 제어할 방도로 ‘행인정(行仁政)’ 3자로 대답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위해 〈靜退書院創建時通諭士林文〉을 지었다.
향년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이후(趙爾後)‧조이중(趙爾重)‧조이숙(趙爾䎘)‧조이소(趙爾昭)‧조이한(趙爾翰)‧조이병(趙爾炳)이다.
저서로는 6대손인 조한규(趙韓圭)가 활자로 간행한 《시암집(時庵集)》이 있다. 총 7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권두에 송래희(宋來熙)의 서문이 실려 있고, 권말에 조상규의 발문이 있다.
 
6) 강백년(姜栢年)

1603년(선조 36)∼1681년(숙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峰)‧한계(閒溪)‧청월헌(聽月軒). 아버지는 강주(姜籒)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김응서(金應瑞)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장령(掌令)을 지내고, 1646년에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자 부교리로서 강빈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삭직당했다. 이해에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동부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상소하여 전국에 걸쳐 향교를 부흥케 하였고, 1648년 대사간으로 다시 강빈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1653년(효종 4) 좌승지에 오르고 충청도‧강원도의 관찰사를 거쳐 1660년(현종 1)에 예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0년 도승지‧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현종이 죽자 그 시책문(諡册文)을 지었고 예조판서‧우참찬‧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관직재직중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
만년에는 고금의 가언(嘉言)과 선정에 관한 것을 수집하여 《대학》의 팔조를 모방하여 《한계만록》을 지었고, 약간의 시문이 《설봉집》에 실려 있다.
169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뒤에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 수안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청주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7) 윤현(尹俔)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도사(都事)를 증직하였고, 추향하였다.
8) 조이후(曺爾後)

생졸년 미상.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경화(景和), 호는 야곡(冶谷).
조선 시대에 천거로 관직에 오른 관료이다. 아버지는 시암(時庵) 조상우(曺相禹)이다. 현종이 온천에 행차했을 때에 자헌(自軒) 이경석(李景奭)이 이후(爾後)와 아우 조이중(曺爾重)의 현명함과 효행을 천거(薦擧)하였다. 이로 인하여 특별히 교관(敎官)에 제수되었고, 후에 서연관(書筵官)에 제수되었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아버지와 함께 온양(溫陽)의 정퇴사(靜退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