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봉암서원(鳳巖書院)-미복설
   충남 연기군 서면 월하리 3구 구서원(월계마을)
   송재(松齋) 한충(韓忠, 1486-1521),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51년(효종 2)
   
   미복설
   
봉암서원은 조선시기 연기현에서 자리한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송재(松齋) 한충(韓忠, 1486-1521),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던 서원이었다. 
봉암서원이 처음 창건되던 1651년(효종 2)에는 지금의 서면 월하리 3구 구서원(월계마을) 지역에 서원을 세우고 기묘명현인 송재 한충을 독향하였으며, 그로부터 11년 후인 1662년(현종 3)에는 호서 사림계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사계 김장생을 병향할 것을 결정하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665년(현종 6)에는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게 되었다. 이때 서원의 이름도 '번암서원'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번암서원은 곧바로 석담으로 이건되고, 다시 현재의 위치인 봉암으로 재이건되면서 서원명칭도 다시 '봉암서원'으로 바뀌어졌다. 이후 1685년(숙종 11)과 1712년(숙종 38)에는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을 차례로 추향하고 10년 후인 1757년(영조 33)에는 '봉암서원 사적비'가 세워졌다. 
한편 1824년(순조 24)에 사찬으로 간행된 『연기읍지(燕岐邑誌)』에는 봉암서원의 운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에 동재에 장의 1인, 유사 1인, 서재에 장의 1인을 두었다. 원생은 30명이며, 모입 30명을 두었다. 
봉암서원은 1684년(고종 1)에 훼철된 후 재건되지 못한 까닭으로 서원은 없어졌고, 서원이 자리하던 야산 중록에는 봉암서원 사적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