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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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계담서원(桂潭書院)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안 향(安 珦) 안 향(安 珦) 이 황(李 滉) 이 이(李 珥) 안문개(安文凱) 안종원(安宗源) 안숭선(安崇善) 이석형(李石亨) 김일손(金馹孫) 주세붕(周世鵬) 이지함(李之菡) 안명세(安明世) 안덕린(安德麟) 안 술(安 述) 최익현(崔益鉉) 김 구(金 九) 홍범식(洪範植) 연병호(延秉昊)
   1824년(순조 24)
   
   봄. 가을
   
1824년(순조 24), ‘계담사(桂潭祠)’로 창건돼 안명세(安明世) 선생의 춘추정필 정신을 기리어오다, 25년 후 하담(荷潭) 안 선생을 추배하고 있던 중, 고종 8년(1871년)에 전국 서원 훼철령에 의해 일부 부재로 망선암을 세우고 자손들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 지난1991년 중산 안동준 옹에 의해 괴산, 연풍, 청안, 음성, 충주향교의 유림과 전교들의 찬의를 받고 성균관의 승낙을 받고 ‘계담서원’을 창건하게 된 것이다.
서원에 추서된 인물은 출생연대 순으로 안향(安珦) · 이황(李滉) · 이이(李珥) · 안문개(安文凱) · 안종원(安宗源) · 안숭선(安崇善) ·이석형(李石亨) · 김일손(金馹孫) · 주세붕(周世鵬) · 이지함(李之菡) · 안명세(安明世) · 안덕린(安德麟) · 안술(安述) · 최익현(崔益鉉) · 김 구(金 九) · 홍범식(洪範植) · 연병호(延秉昊)씨 등으로 18명현을 배향하고 봄, 가을로 나누어 두 번 제향 봉행하는 제례의식을 실천하고 있다.

1)주벽-안향(安珦, 1243~1306)
고려 후기의 명신(名臣)·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해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흥주(興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성윤(成允)의 딸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해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변경되었다.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郎)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해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 (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해 문무백관으로 하여금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해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같은 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해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다.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2)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이다.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이다.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3)이이(李珥, 1536~158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부친은 찰방(察訪)을 지낸 원수(元秀)이고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이다.
강릉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에 전심하여 23세 때 이황을 찾아가 만났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 식년 문과에 모두 장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호조 좌랑에 초임, 예조 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로 춘추관 기시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청주목사로 복직, 다음해 다시 사직하고 해주에 낙향했으며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했다. 그 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하직,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 연구에 전심하다가 1581년 다시 불려 대사헌·예문관 제학을 겸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 우참찬을 역임하였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으며 같은 해 판독령부사에 등용, 이조 판서에 이르러 동서 분당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 유학계에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으며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설보다는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을 학문 연구의 태도로 여겼다. 또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인심도심상위종시설을 선조임금에게 올리기로 하였다.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근본 사상으로 여겨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학문을 민생 문제와 만언봉사도 율곡의 경장론과 폐법을 강조하였다. 백성들에게 선양(先養) 후교(後敎)를 강조하였다. 글씨에 능하여 조자앙(趙子昻)의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사후 문묘에 종사되었고 선조의 묘정에 배향하였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귀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황주의 백록동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4)안문개(安文凱, ?∼1338)
고려 후기의 문신. 1321년(충숙왕 8)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왕이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로 원나라에 불리어 가 4년동안 억류되어 있었을 때 함께 있으면서 왕을 위한 경비를 국내에서 염출하여 조달하였는데 심양왕 고가 이를 미워하여 원나라 조정에 고하고 종정부(宗正府)에 가두었다. 왕을 따라 귀국한 뒤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고, 1327년(충숙왕 14)에는 왕이 원나라에 있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의 호를 받았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홍언박(洪彦博)·이달존(李達尊)·이문정(李文挺)·최재(崔宰)·정운경(鄭云敬) 등 33인과 명경(明經)·은사(恩賜) 각 2인을 급제시켰고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1338년 찬성사(贊成事)로서 죽었다.
 
5)안종원(安宗源, 1325∼139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 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축(軸)이다. 1341년(충혜왕 2) 과거에 급제,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임되었다. 임기가 차서 승진, 전보될 즈음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아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안축은 이 소식을 듣고 가문에 인물이 났다며 기뻐하였다. 1년 뒤에 삼사도사에 임명되었고, 공민왕 초에 전법정랑이 되었다. 이 때 많은 소송사건을 법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양광도안렴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을 충주에서 맞았다.
왕이 다시 음죽(陰竹)으로 옮기자 관리와 백성이 다 도망을 가 왕을 접대할 수 없게 되자, 문책을 당해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전법총랑(典法摠郎)에 승진되었다. 그 무렵 신돈(辛旽)에게 아부하는 사대부가 많았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참소를 당해 강릉부사로 좌천되었지만 그 곳에서 선정을 펼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지냈다.
7∼8년을 한거한 뒤 신돈이 주살된 후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우왕 초에 좌사의대부 유순(柳珣) 외에 다섯 사람과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환관의 폐단을 논했으나, 재상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했다가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된 뒤, 흥녕군(興寧君)에 피봉되었다. 이 무렵 공민왕 때부터 환관으로 있던 김현(金玄)이 내사(內事)를 잘 정돈하지 못한다고 논박해, 김현은 회덕현에 유배되었다. 또한 환관의 수를 10명 내로 줄여서 국정의 문란을 막아야 한다고 소 올렸다.
또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사행(使行)을 기화로 금·은·말 또는 포목들을 밀반출해 장사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1382년(우왕 8)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改封)되고 다시 공신호를 받았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최영(崔瑩)이 탐관과 권신들을 숙청할 즈음에, 청렴근직한 그를 문하찬성사로 기용, 관리의 인사권을 맡겼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 뒤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이 되고, 조선조에 와서는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6)안숭선(安崇善)
순흥인(順興人) 문정공(文貞公) 축(軸)의 후손이다. 천성이 후하고 아담하며 스스로 수양하여 도량이 넓었다. 또한 세상일에 구애되지 않고 덕을 쌓아 남에게 나누며 지냈다.
 
7)이석형(李石亨, 1415∼147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옥(白玉), 호는 저헌(樗軒). 할아버지는 임천부사 종무(宗茂)이고, 아버지는 대호군 회림(懷林)이며, 어머니는 박언(朴彦)의 딸이다. 김반(金泮)의 문인이다.
1441년(세종 23)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 이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직전(直殿)·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응교로 재임한 1447년 문과 중시에 합격했으며, 왕명으로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로 학문에 진력하였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 뒤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6년 6월,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전해지자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 동헌에 남겨서, 치죄하자는 대간의 여론이 있었으나 세조에 의해 묵살되고 오히려 예조참의에 올랐다. 1457년 판공주목사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첨지중추원사로 잠시 한직에 있었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이 되었다.
1460년 세조의 특명으로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의 서쪽지방 순행을 도와, 세조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人)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한다. 이듬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경기관찰사를 역임하고, 1462년 호조참판을 거쳐 판한성부사에 7년 동안 재임하였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를 겸해 호패법을 철저히 고핵(考覈 : 조사해서 밝힘)해 정리하였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70년(성종 1)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지성균관사를 겸해 주문(主文)의 위치를 맡았다.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필법이 신묘하고 집현전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고려사≫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 때에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 작업에 참여해 ≪논어≫의 구결을 주관하였다. 만년에는 성균관 서쪽에 계일정(戒溢亭)을 짓고 시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대학연의 大學衍義≫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를 덧붙인 ≪대학연의집략 大學衍義輯略≫ 21권과 ≪저헌집 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 歷代兵要≫·≪치평요람 治平要覽≫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8)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선시대의 학자·문신. 무오사화로 사형에 처해졌으며, 이로 인해 새로 등장한 신진 사림은 집권층인 훈구파에 의해 거세되었다. 중종반정 후 신원되고,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9)주세붕(周世鵬, 1495~155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서원을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하였다. 이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의 사액을 받아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풍기사림의 중심기구로 자리잡았다.
 
10)이지함(李之菡, 1517∼1578)
조선 중기의 학자·기인(奇人), ≪토정비결 土亭秘訣≫의 저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이며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이다. 색(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후일에 그가 수리(數理)·의학·복서(卜筮)·천문·지리·음양·술서(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573년(선조 6)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지금의 포천) 현감이 되었고,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 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굶주린 사람)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일 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가 심해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그것이 ≪토정비결≫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 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어서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1713년(숙종 39)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1)안명세(安名世, 1518∼154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혹은 慶應)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으며, 사관(史官)으로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고, 이듬해에는 승정원주서에 올랐다. 그러나 1548년(명종 3)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 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그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사형에 임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1570년에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받았다.
 
12)안덕린(安德麟, 1563∼160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인서(仁瑞), 호는 사촌(沙村). 아버지는 호군(護軍) 총(聰)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8세 때 시부(詩賦)를 지었다.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4년(선조 17)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뽑혀 있었으나 시관들의 분쟁으로 탈락되고 말았다. 1591년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대신들의 죄를 성토할 때 그가 장의(掌議)로서 주관하였다. 이 일로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603년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풍기에 낙향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1606년 성균관에 올라왔다가 문묘의 동무(東廡)에 익명으로 조신들을 중상모략한 낙서를 발견하고 하인들을 시켜 지워버리게 한 일로 문초를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향리에서 이황(李滉)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응용, 실정에 맞게 시정하여 향풍을 진작시켰다. 풍기의 숭현사(崇賢祠)에 배향되었다.
 
13)안술(安述)
자(字)는 효여(孝汝), 호(號)는 화담(花潭), 본관(本貫)은 순흥(順興) 안명세(安明世)의 종증손(從曾孫)이다.
천자(天姿)가 초매(超邁)하고 천품(天稟)이 절륜(絶倫)하였다. 백부(伯父) 사촌(沙村)에게 수학(受學)하여 충효(忠孝)와 시례(詩禮)로서 이름이 있었음으로 천거(薦擧)한바 되어 인조(仁祖) 조에 진사(進士)하고 세마(洗馬)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때 화의(和議)를 배척하여 존주록(尊周錄)에 실리었다. 유복자(遺腹子)로 부친상(父親喪)에 복을 입지 못하고 성장(成長)하였음을 한하고 3년동안 추복(追服), 시묘(侍墓)하였다. 계담사(桂潭祠)에 향사(享祀)되었다.
 
14)최익현(崔益鉉, 1833~1906)
조선 후기의 지사.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15)김 구(金 九, 1876~1949)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6)홍범식(洪範植, 1871∼1910)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충청북도 괴산 출생. 참판(參判) 승목(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5통은 일본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7)연병호(延秉昊, 1892∼?)
독립운동가. 일명 병호(炳昊). 충청북도 괴산 출신.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당하자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난징·상해 등지로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로 하고 동지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입국하여 이병철(李秉澈)·조용주(趙鏞周) 등을 포섭, 비밀항일운동단체인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설립목적은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여 임시정부에 제공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정부에 송금하는 것을 주요골자로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여성들의 비밀결사인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와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1920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
1922년 출옥하자 상해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과 같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그 뒤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86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1991년에 복원되었다. 사당 외에 재실(齋室), 강당(講堂)과 별도로 세덕사(世德祠)도 건립하였으며,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참고-괴산군지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동양일보 http://www.dynews.co.kr/


관리자 12-11-14 13:25
 
괴산군, 감물 계담서원 추계 제향
 
기사입력: 2012/11/12 [15:46]  최종편집: ⓒ 뉴스충청인     
 
 
이민희 기자 
 
[괴산=뉴스충청인] 이민희 기자=괴산군 감물면 계담서원이 12일 추계 제향을 지냈다.

이날 행사에는 유림 및 주민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각수 괴산군수가 초헌관, 이철규(토정 이지함 후손) 씨가 아헌관, 이도형(계담서원 교양대학 20기 접장) 씨가 종헌관으로 제를 봉행했다.

계담서원은 1824년(순조 24) 계담마을 뒷산에 창건했으며, 1865년(고종 2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90년에 순흥안씨 양도공파 종회 고 안동준 회장의 노력으로 복원됐다.

현재 문성공(안향), 문의공(안문개), 문정공(안축), 문간공(안종원), 문숙공(안숭선), 문민공(주세붕), 문순공(이황), 문강공(이석형), 문민공(김일손), 문강공(이지함), 한림공(안명세), 문성공(이이), 사촌공(안덕린), 세마공(안술), 최익현, 홍범식, 김구, 연병호 등 18명현(名賢)을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