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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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상현서원(象賢書院)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 서원리 304
    김 정(金 淨) 성 운(成 運) 성제원(成悌元) 조 헌(趙 憲) 송시열(宋時烈)
   1555년(명종 10)
   1610년(광해군 2)
   음력 2월, 8월 중정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8호(1984.12.31지정)
1555년(명종 10) 동주 성제원(東洲 成悌元)이 삼년성 안에 충암 김정(沖庵 金淨)을 향사하는 독향원(獨享院)을 세우고 ‘삼년성서원’이라 하였는데, 1610년(광해군 2)에 ‘상현’이란 이름의 사액을 받았다. 한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다음으로 세워졌으며, 충청북도에서는 첫 번째로 설립되고 사액 받은 서원으로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제사지낸다.
1672년(현종 13) 삼년성 안에서 외속리면 서원리로 옮겨 세웠으며, 대곡(大谷) 성운(成運)을 을사명현으로 배향하고 보은현감을 지낸 동주 성제원과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1681년(숙종 7)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1695년(숙종 21)에 추가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고, 그때 서원의 강당은 보은향교(報恩鄕敎:충북유형문화재 95)로 옮겨 명륜당을 세웠다. 1892년(고종 29) 찰방 김세희(金世熙)가 제단을 만들어 제향을 올렸으며, 1896년(고종 33) 장례원집례인 김문희(金文熙)와 송근수(宋近洙)가 서원을 재건하고, 1919년에 중수하였다. 1986년에는 정부예산으로 사당과 정문을 새로 세우고 바깥담을 쌓았다.

1)주벽-김정(金淨, 1486∼152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庵)·고봉(孤峯). 보은 출신. 호(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처용(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윤공(尹恭)의 딸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 :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2)성운(成運, 1497∼157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세준(世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비안박씨(比安朴氏)로 사간 효원의 딸이다. 1531년(중종 26) 진사에 합격, 1545년(명종 즉위년)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그 뒤 참봉·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선조 때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은둔과 불교적 취향을 드러낸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이지함(李之菡)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그가 죽자 선조가 제문을 내려 애도하였으며, 뒤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대곡집≫ 3권 1책이 있다.
 
3)성제원(成悌元, 1506~1559)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동주(東洲)·소선(笑仙)이며,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부사 몽선(夢宣)의 아들로서 유우(柳藕)의 문인이다. 잦은 사화(士禍)로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였다. 이희안(李希顔)·성운(成運)·조식(曺植)·신계성(申季誠)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쌓고 후학을 가르쳤다.
성리학 외에도 지리·의학·복술(卜術)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1553년(명종 8)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군기시주부와 돈녕부주부를 거쳐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 보은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들었으며, 임기가 끝난 후 나라에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다.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동주유고≫가 있다.
 
4)조헌(趙憲, 1544∼1592)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 출생.황(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다.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영(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는데,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다. 그러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 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5)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찬정소학언해, 주문초선,계녀서 등이 있고,문집으로는 우암집(167권)· 송자대전(215권) 송서습유(9권) 속습유(1권) 등이 간행되었다.

나지막한 산을 뒤로하고 세운 이 서원은 작은 규모의 사당과 비석이 안치된 비각, 출입문으로 구성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의 비각이 있고 뒤편으로 별도의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김정의 위패를 중심으로 좌우에 성운, 성제원, 조헌, 송시열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웠는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우진각지붕 단층목조건물로 앞면 반 칸에는 마루를 놓고 어칸에는 쌍각문을, 오른쪽과 왼쪽 협칸에는 편문을 달았으며, 주위에 토석담장을 쌓고 중앙에 편문을 달았다.

1)상현서원 묘정비
1778년(정조 2)에 세웠으며 비문은 예조참의 김양행(金亮行)이 짓고, 사헌부장령 김종후(金鍾厚)가 썼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heritag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