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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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송계서원(松溪書院)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수원리
   조 위(曺 偉) 박 영(朴 英) 김시창(金始昌) 박응훈(朴應勳) 남지언(南知言) 박유동(朴惟棟)
   1664년(현종 5)
   1726년(영조 2)
   음력 3월
   
1664년(현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위(曺偉), 박영(朴英), 김시창(金始昌), 박응훈(朴應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707년(숙종 33)에는 남지언(南知言), 박유동(朴惟棟)을 추가 배향하였다. 1726년(영조 2)에 ‘송계(松溪)’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맡아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위패를 서원터에 매안(埋安)하고 설단(設壇)하여 매년 음력 3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그 뒤 1954년경 안삼준(安三俊), 남형우(南衡祐), 박제원(朴濟元) 등을 중심으로 한 유림이 유허비와 비각을 설립하였다.

1)주벽-조위(曺偉, 1454∼150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경수(敬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深)이고, 아버지는 울진현령 계문(繼門)이다. 어머니는 유문(柳汶)의 딸이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족숙 석문(錫文)이 불러 가숙에 머물러 독서하도록 하였다.
1472년(성종 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에 첫 번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그 뒤 홍문관의 정자·저작·박사·수찬, 사헌부지평·시강원문학·홍문관교리·응교 등을 차례로 거친 뒤,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함양군수가 되었다. 이어 의정부검상·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천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죽었다.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양군수 때는 조부(租賦)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 ≪함양지도지 咸陽地圖志≫를 만든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일선지도지 一善地圖志≫를 만든 것과 같은 일이다. 또, 유향소(留鄕所)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행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박식하고 문장이 위려(偉麗)하여 문하에 많은 문사가 배출되었다. 유배 중에도 저술을 계속, ≪매계총화≫를 정리하다가 죽었다. 작품으로 <조계문묘비曺繼門墓碑>가 있고, 저서로 ≪매계집≫이 있다. 금산의 경렴사(景濂祠)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2)박영(朴英, 1471∼154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철손(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수종(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의 딸이다. 선산(善山)에서 대대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 막하(幕下)에 있을 때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그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했는데, 유인숙(柳仁淑)의 모함으로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임을 적극 주장해 풀려났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의술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경험방 經驗方≫·≪활인신방 活人新方≫·≪백록동규해 白鹿洞規解≫ 등이 있다.
 
3)김시창(金始昌, 1472∼1558)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풍덕(豊德). 자는 정양(廷揚), 호는 남정(嵐亭). 할아버지는 사직(司直) 효신(孝信)이고, 아버지는 의(譜)이며, 어머니는 하산조씨(夏山曺氏)로 승중(承重)의 딸이다.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금산(金山)에 거주하면서 ≪가례 家禮≫에 의한 상례(喪禮)를 철저히 준행하는 한편, 효행이 뛰어나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로 인해1518년(중종 13)에는 유학(幼學)으로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에 의해 현량과(賢良科)에 피천(被薦)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거상(居喪)의 예를 다하였음이 조정에 알려져 금산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그의 효절(孝節)은 ≪삼강록≫에 수록되었으며, 죽은 뒤 참봉에 추증됨과 아울러 황간(黃澗)의 모현서원(慕賢書院)과 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4)박응훈(朴應勳)
16세기 중엽의 인물로 호는 오촌(梧村)이고 본관은 충주 박씨로 문장과 서화 솜씨가 뛰어난 효자로서 아버님이 돌아가자 내동 뒤 황간면 소계리 차갑에 장지를 구하려 산에 들어감에 호랑이가 앞에 나타나 황간면 소계리 차갑에 안장할 것을 끄덕이었으며, 항상 사슴과 노루를 잡아다가 제물로 쓰게 도와주었으니 선조 34년(1601)에 정려되었다.
 
5)남지언(南知言, 1507~ )
중종(中宗) 2년(1507) 출생하여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 나가지 않고 귀향(歸鄕)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남지언은 그의 아버지 남인(南寅) 및 아들 남경(南景)과 함께 특출한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되어 삼효각(三孝閣)이 건립되었으나 불에 타 없어졌다 한다.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다.
 
6)박유동(朴惟棟, 1604∼168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시보(時甫). 호는 일석(一石). 아버지는 사옹원 참봉(司甕院參奉)에 증직된 사삼(事三), 어머니는 배천조씨(白川趙氏)로 판서(判書)에 추증된 응지(應祉)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재예가 뛰어나 대성의 기질이 있었는데 김장생에게 배우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므로 도학자의 인격을 닦었다. 1652년(효종 3) 진사시에 합격하여 목릉참봉(穆陵參奉)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거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지낸 뒤 고향에 돌아와서 후진의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인근에서 찾아와 배움을 청하는 사람으로 항상 문을 메웠다. 국기일에는 반드시 소식(素食)만 하였고 ≪주자서 朱子書≫가 바다와 같이 깊어서 모든 학문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쳤다. 윤증(尹拯)이 스승인 송시열과 틈이 벌어지자 인간의 의리가 아니라고 꾸짖기도 했다.
저서로는 ≪일석유고≫ 2권이 있고, 글씨도 잘 써서 금석문자가 남아 있으며, 뒤에 송계서원(宋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web.
감고을 큰마당 http://www.ydi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