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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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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자(朱 子) 정 구(鄭 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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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선조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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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년(숙종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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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월 중정(中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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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1호(1990.12.14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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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선조 35)에 정구(鄭逑)가 충주목사로 부임하자 이곳 유림의 건의로 기존의 백운서당을 운곡서원으로 개편하고 주자(朱子)의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61년(현종 2)에 정구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676년(숙종 2)에 ‘운곡(雲谷)’이라 사액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4년에 복원되고 1963년에 중수되었다. 사우에는 주자와 정구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고, 재실은 향사 때 제관의 숙소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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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주자(朱子,1300~1200) 주자(주희)는 남송 말의 인물로 자가 원회(元晦)이고 호는 회암(晦菴)이다. 주돈이, 정호, 정이의 새로운 학품을 포섭하여 이를 집대성한 주자학을 이룩하였으며 사서를 중요시하여 이를 중심으로 학문체계를 세웠다. 2)정구(鄭逑, 1543∼162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윤증(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응상(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환(煥)의 딸이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다. 1603년 ≪남명집 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송원기(宋遠器)·손처눌(孫處訥)·한준겸(韓浚謙)·문위(文緯)·장흥효(張興孝)·이윤우(李潤雨)·허목(許穆)·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역사·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복서(卜筮)·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1573년 ≪가례집람보주 家禮輯覽補註≫를 저술한 이래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오복연혁도 五福沿革圖≫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으며, 이황의 예에 관한 서신을 모은≪퇴계상제례문답 退溪喪祭禮問答≫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읍지에도 관심이 많아 1580년 ≪창산지 昌山誌≫를 편찬한 이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거의 예외 없이 읍지를 편찬해 ≪동복지 同福志≫·≪관동지 關東志≫ 등 7종의 읍지를 간행하였다. 특히 ≪영가지 永嘉志≫·≪평양지 平壤志≫ 등의 편찬에도 관여해 후대의 읍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 咸州志≫ 하나 뿐이다. 읍지 편찬의 목적은 생민(生民)도 있었지만 풍속의 순화와 교육, 즉 교화에 주안점이 있었다. 성리설(性理說)은 이황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부분으로 경전 가운데 특히 ≪심경 心經≫을 중시하였다. 외출할 때에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주된 교재였다 한다. 1603년 정민정(程敏政)의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비판한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계승해 ≪심경발휘 心經發揮≫를 저술했는데, 육구연(陸九淵)의 입장을 반영한 정민정의 설을 모두 삭제하고 이정(二程, 정이, 정호)과 주자의 설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심경≫은 경(敬)을 요체로 하는 성리학의 수양방법을 잘 제시한 책으로 16세기 후반 이후 영남 이황학파의 하나의 학문적 특색으로 자리잡았다. 이외에 역시 이황의 저술인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를 분류해 ≪개정주자서절요총목 改定朱子書節要總目≫을 편찬했으며, ≪성현풍범 聖賢風範≫·≪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염락갱장록 濂洛羹墻錄≫ 등의 성리서를 저술하였다. 역사서로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의 영향을 받으면서 연표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를 정리해 뒤에 나타나는 정통론과 강목체 사서와의 매개 역할을 한 ≪역대기년 歷代紀年≫과 역대 인물들의 정리와 평가의 성격을 지닌 ≪고금충모 古今忠謨≫·≪치란제요 治亂提要≫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문학서로서는 ≪고금회수 古今會粹≫·≪주자시분류 朱子詩分類≫ 등을 편찬했으며, 의학서로는 눈병에 대한 처방을 담은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집에 소장한 의학서에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뽑아 정리한 ≪광사속집 廣嗣續集≫ 등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은 이황학파의 주자를 기반으로 한 학문적 전통과 서경덕·조식학파의 박학(博學)의 전통을 계승한 결과였다. 근기남인 실학파의 탈주자학적 사상의 뿌리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서경덕·조식에 있었는데 그는 이 한 부분을 전달해주는 교량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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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공간과 제사 공간으로 크게 나뉘는데 앞쪽 교육 공간에는 현재 주춧돌만 남아 있다. 그 뒤편의 제사 공간에는 ‘운곡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간결하고 소박하게 처리한 건축 양식에서 서원 건축의 한 특징을 볼 수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재실(齋室), 고직사(庫直舍), 정문(旌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주자와 정구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고, 재실은 향사 때 제관의 숙소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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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장전적 ≪주자대전≫ 10권, ≪한강연보 寒岡年譜≫ 1권, ≪유첩 儒牒≫ 2권, ≪강당절목≫ 1권, ≪원지 院誌≫ 2권, ≪운곡서원모속안 雲谷書院募屬案≫ 1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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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web.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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