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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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지천서원(知川書院)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김세필(金世弼) 김자수(金自粹) 김 저(金 儲) 김 억(金 億) 김정현(金鼎鉉) 김홍욱(金弘郁) 김종현(金宗鉉) 박 상(朴 祥)
   1740년(영조10년)
   
   
   3월, 9월 초정(初丁)
조선 중종 때 김세필(金世弼)이 현재의 위치에 서재(西齋)를 짓고 은거하였는데, 그가 죽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세필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으로 개조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配享)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
그 뒤 1893년에 유림과 후손들이 협의하여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향사(享祀:제사)를 지내오다가 1906년에 복원하였으며, 김자수(金自粹)·김저(金儲)·김억(金億)·김정현(金鼎鉉)·김홍욱(金弘郁)·김종현(金宗鉉)·박상(朴祥)을 추가배향하였다. 그 후 1963년에 중수하고, 1986년에 보수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첫번째 丁日)과 9월 초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김세필(金世弼, 1473∼153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 또는 지비옹(知非翁). 아버지는 첨정 훈(薰)이며,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학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의 정자·박사를 거쳐 수찬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홍문관응교로 기용된 뒤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뒤에 전한·형조참판·부제학을 지내고 외직으로 광주목사(廣州牧使)·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대사헌·이조참판을 지내고, 151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를 사사(賜死)하자, 임금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杖配)되었다.
1522년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십청헌을 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 뒤 공로를 인정하여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십청헌집≫ 4권이 있다.
 
2)김자수(金自粹,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자수(子粹).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오(珸)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主簿)에 제수되었다.
우왕 초에 정언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 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때에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92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고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 결코 묘갈(墓碣)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 있다.
 
3)김저(金儲, 1512∼15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학광(學光). 할아버지는 훈(薰)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세필(世弼)이며, 어머니는 이탁(李鐸)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에 유학으로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 뒤 검열(檢閱)이 되었다. 1542년에 심한 흉년이 들자 경상도와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이를 진휼하였고, 인종 초년에는 시독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곧 교리(校理)·지평(持平)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사사되고 가산과 처자도 적몰되었다. 선조 즉위 후 복권문제가 논의되다가 1570년(선조 3)에 다른 10여명과 함께 복권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4)김억(金億)
본관은 경주이며, 조선(朝鮮) 인조조의 문신(文臣)으로 김저의 아들이다. 일찍이 학문(學問)에 뜻을 두어 사계 김장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였다. 1623년(인조 1)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6품직을 제수(除授)하였다. 후에 벼슬을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5)김정현(金鼎鉉, 1591∼167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길(重吉), 호는 추곡(秋谷)·송림(松林). 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관 선경(善慶)이고, 아버지는 생원 순(峋)이며, 어머니는 부호군(副護軍) 한광윤(韓匡胤)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시골에 은둔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인해 정권이 안정되어가자, 1630년(인조 8)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높은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택하여 계속 다섯 고을을 다니면서 다스렸다. 어버이가 죽은 뒤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기로계(耆老契)를 만들고 향산(香山)의 옛일을 본받아 유유자적하였다.
뒤에 노인 우대로 다시 중추부(中樞府)에 들어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우윤을 역임하였다.대사헌에 천거되었으나 고례(古例)에 어긋난다 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1675년(숙종 1)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6)김홍욱(金弘郁, 1602∼165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 서울 출생. 연(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승지 호윤(好尹), 아버지는 찰방 적(積), 어머니는 화순최씨(和順崔氏)로 동지중추부사 원(遠)의 딸이다.
1623년(인조 즉위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파방되어 합격이 취소되고 재시험에서 합격했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뒤 설서(說書)를 겸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호종, 강경론을 주장했다. 당진현감으로 나가서는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뒤 다시 복관되어 대교(待敎)·전적·지평·부수찬·정언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1641년 수찬이 된 뒤 1644년 교리·헌납을 거쳐1645년 이조좌랑이 되었는데, 권신 김자점(金自點)과 뜻이 맞지 않아 사직했다. 1648년 응교가 되어 관기(官紀)·전제(田制)·공물방납(貢物防納) 등 시폐(時弊) 15개조를 상소했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1650년(효종 1) 사인(舍人)이 된 뒤 집의·승지를 거쳐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가 되어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실시했다. 1654년 황해도관찰사 재임 시 천재로 효종이 구언(求言)하자 8년 전 사사된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 昭顯世子의 嬪)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상소했다. 이른바 ‘강옥(姜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 보전과도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이 말을 꺼내자 격노한 효종에 의해 하옥되었고, 결국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그가 죽기 전 “언론을 가지고 살인해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한 말은 후세인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1718년(숙종4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1년(경종 1) 서산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후손의 노력으로 연보 등이 추보(追補)된 ≪학주집 鶴洲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7)김종현(金宗鉉, 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문신. 1011년(현종 2)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었고, 1019년 정월 강감찬(姜邯贊)의 휘하에서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수도 개성을 호위하였다.
같은 해 2월에 거란군사가 구주(龜州)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싸웠는데,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이때 구원군을 이끌고 치니 거란군사가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하므로 뒤쫓아 쳐서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니, 넘어져 죽은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낙타·갑옷·투구·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 전투에서 적장 소배압(蕭排押)이 거느린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명뿐이었다고 한다. 그 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이 되고 1031년(덕종 즉위년) 우간의대부에 올랐고,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8)박상(朴祥, 1474∼15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광리(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천군수 소(蘇)이고,아버지는 진사 지흥(智興)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 초, 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아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論劾)하여 곧 종묘서영(宗廟署令)·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또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평(南平)의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장악첨정(掌樂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 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1519년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1521년 상주와 충주의 목사를 지내고, 만기가 되자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이 되었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 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로 좌천되었고,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고,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경모문(景慕門)과 양 옆의 협문(夾門)으로 된 삼문(三門), 정면 4칸, 측면2칸으로 된 재실(齋室), 고직사(庫直舍), 유허비(遺墟碑), 홍살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자수를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김세필, 박상, 김저, 김억, 김홍욱, 김정현, 김종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재실은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한편, 지방 유생의 학문 강론 장소 및 각종 행사 때의 협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고직사는 평소에 관리인이 주거하며, 향사(享祀:제사) 때에는 제기(祭器) 보관 및 제관의 숙소를 겸하고 있다.
유물로는 <서원중건기 書院重建記>와 <서원중수기 書院重修記>, 8선현의 행적략(行蹟略) 등이 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web.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