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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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기암서원(機巖書院)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갈산리 455-1
   강백년(姜栢年), 오 숙(吳 熽)
   1699년(숙종 25)
   
   매년 음력 3월 1일
   
기암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강백년(姜栢年)의 위폐를 봉안하고 세운 서원으로 1826년(순조 26)에 오숙(吳熽)을 추향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가 1984년에 오창면 기임리에서 낭성면 갈산리 호평마을로 옮겨 다시 복원하고 갈산사라 이름 하였다. 그 후 1987년에 강당을 새로 지어 충효의 도장을 마련하였다.

1)주벽-강백년(姜栢年, 1603∼168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閑溪)·청월헌(聽月軒). 인(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운상(雲祥)이고, 아버지는 주(籕)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응서(應瑞)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장령(掌令)을 지내고, 1646년에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자 부교리로서 강빈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삭직당했다.이해에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동부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상소하여 전국에 걸쳐 향교를 부흥케 하였고, 1648년 대사간으로 다시 강빈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1653년(효종 4) 좌승지에 오르고 충청도·강원도의 관찰사를 거쳐 1660년(현종 1)에 예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0년 도승지·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현종이 죽자 그 시책문(諡冊文)을 지었고 예조판서·우참찬·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관직재직 중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 만년에는 고금의 가언(嘉言)과 선정에 관한 것을 수집하여 ≪대학≫의 팔조목을 모방하여 ≪한계만록≫을 지었고, 약간의 시문이 ≪설봉집≫에 실려 있다. 169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뒤에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 수안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청주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 오 숙(吳 熽, 1602∼167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회백(晦伯), 호는 금암(琴巖). 할아버지는 태좌(台佐)이며, 아버지는 행원(行遠)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經史)의 해득에 뛰어났고, 문사(文辭)가 화려하며 필법이 호건(豪健)하였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42년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을 지냈다. 아버지상을 당하여 낙향하였다가 1646년에 정언(正言), 이듬해에 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648년 고성현령을 지내고, 1651년 (효종 2)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이듬해 외직으로 나가 홍산(鴻山)·영천(永川)·문천(文川)·대흥(大興)·풍기(豊基)의 수령을 역임하고, 1666년(현종 7) 좌통례(左通禮)를 거쳐 흥해군수가 되었다. 1668년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1673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 유학을 장려하고, 청렴하여 군읍민의 칭송을 받았으며 청백리의 칭호를 받았다. 1826년(순조26년) 기암서원(機巖書院)에 추향되었고, 1794년(정조 18)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갈산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겹처마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중앙에 쌍문과 좌우에 쪽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앞처마에는 갈산사라는 현판을 걸었고, 마당 앞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유물로는 ≪창건록≫ 1권과 ≪원지 院誌≫ 1권 등이 있다.

참고-청원군지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