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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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송천서원(松泉書院)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김사렴(金士廉) 최유경(崔有慶) 이정간(李貞幹) 박광우(朴光佑) 이지충(李之忠) 조 강(趙 綱) 이대건(李大建) 이제신(李濟臣) 최석정(崔錫鼎) 이인혁(李寅爀) 이효석(李孝碩) 남구만(南九萬) 박문수(朴文秀) 이종성(李宗城) 김여량(金汝亮)
   1695년(숙종 21)
   
   
   
송천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송천마을에 김사렴(金士廉), 최유경(崔有慶), 이정간(李貞幹), 박광우(朴光佑), 이지충(李之忠), 조강(趙綱), 이대건(李大建)을 배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1723년(경종 3)에 이제신(李濟臣)을 추향하고, 영조대에 최석정(崔錫鼎)과 이인혁(李寅爀)을 추향하고, 1798년(정조 22)에 이효석(李孝碩), 남구만(南九萬), 박문수(朴文秀), 이종성(李宗城) 등을 추향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원생 15인과 자모생 15인을 뽑았다.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는데, 1976년에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은행정마을에 다시 세우고 김여량(金汝亮)을 추향하였다.

1)주벽-김사렴(金士廉,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장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신돈(辛旽)이 집권하였을 때 공경대부들이 모두 신돈을 받들고 왕이 총애하자, 상소하여 신돈이 반드시 뒤에 정사를 어지럽히고 사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간하였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2)최유경(崔有慶, 1343∼1413)
여말선초 때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할아버지는 선부전서(選部典書) 상호군 득평(得枰)이고, 아버지는 감찰대부(監察大夫) 재(宰)이다. 어머니는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이다.
1372년(공민왕 21)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郎)이 되어 각 도의 의염(義鹽)의 염분(鹽盆)이 강호(强豪)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진달하여 염창(鹽倉)에 속하게 하였다. 이어 사헌부장령이 되어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불법을 자행하던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를 탄핵하였다. 1375년(우왕 1) 전법사총랑(典法司摠郎)을 거쳐 1388년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가 되어서는 전민(田民)의 폐단을 고찰하여 바로잡았다. 이 해 여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서북면전운사 겸 찰방으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 감행되자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최영(崔瑩)이 실각한 뒤에도 창왕의 즉위와 함께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발탁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이성계가 즉위하여 개국공신에 이어 원종공신(原從功臣)을 녹훈할 때, 앞서 위화도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했다 하여 일부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성계가 그 충의를 칭찬,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되었다. 1395년에 경상도도관찰사가 되고, 1397년에는 지중추원사로서 경기·충청도 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유하고, 그 이듬해 중추원부사로서 왕의 사명을 띠고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최영지(崔永沚)에게 궁온(宮醞)과 관교(官敎)를 전하여 선위(宣慰)하였다. 같은 해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서 경기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右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가는 등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여러 차례 왕의 특사로 중임을 수행하였다. 1401년(태종 1) 대사헌이 되었고, 그 해 육조와 대간의 천거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404년 판한성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3)이정간(李貞幹, 1360∼143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고부(固夫). 아버지는 원종공신 구직(丘直)이다.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집의를 거쳐 1405년(태종 5) 강화부사가 되었다.
이 때 목장에 뛰어든 호랑이를 인마의 살상 없이 포획하여 비단을 하사받았다. 그 뒤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고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러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노모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여 가내가 공순하기로 소문났다. 이에 세종은 궤장(几杖)을 내리고 교서를 보내어 그 효행을 표창하였다. 명문들이 그 일을 노래하며 책으로 엮어 ≪경수집 慶壽集≫을 내었다. 관직은 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4)박광우(朴光佑, 1495∼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蓽齋)·잠소당(潛昭堂)·소당(昭堂). 할아버지는 정지(貞地)이고,아버지는 생원 인(璘)이며, 어머니는 장유성(張有誠)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형 광좌(光佐)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상처를 입고 옷을 찢어서 머리를 싸매고 정부외랑(政府外廊)에 앉아서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李澯)과 첨지 김로(金魯)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이 신원소를 불러 쓰게 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용솟음치듯 함으로써 그의 절의와 문장을 나타내었다.
1525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36년 재령군수로서 문장에 능하여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였고, 1545년 사간이 되었으나 을사사화로 하옥, 이어 동선역(洞仙驛)으로 유배되던 중 장독으로 인하여 돈화문 밖에서 죽었다.
1547년 가산이 몰수되고, 1570년 신원되었다. 그는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와 교분이 있었으며, 뒤에는 이언적(李彦迪)과 같이 화를 당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절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5)이지충(李之忠, 1509∼156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원로(元老), 호는 삼우당(三友堂).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승건(承健)이며, 아버지는 순(詢)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37년(중종 3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그 문하에는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사귀는 사람들도 모두 당시 이름 있는 선비들이었다.
산수를 매우 좋아하였으나, 만년에는 술 마시고 유람하는 것도 그만두고 조용히 방안에 들어앉아 좌우에 책을 쌓아놓고 보며 세상일에는 별로 뜻을 두지 않고 지냈다.
1553년(명종 8) 이조의 천거로 동부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평생을 경사(經史)에 깊이 파고들어 책을 손에서 놓은 때가 없었으며, 여가에는 붓을 들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복술(卜術)·형률(刑律) 등 여러 방면에도 통달하였으며, 이름있는 학자들도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역시서집람 易詩書輯覽≫을 편찬하고, ≪이정전서 二程全書≫·≪주자대전≫·≪춘추좌전 春秋左傳≫을 초록하여 집에 보관하여 두었다.
 
6)조강(趙綱, 1527∼1599)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숙거(叔擧), 호는 모계(慕溪). 아버지는 교위(校尉) 승윤(承胤)이며, 어머니는 평양조씨(平壤趙氏)로 황(璜)의 딸이다.
처음 정사현(鄭思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과 송인수(宋麟壽)를 사사하였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570년 청주의 유림들과 합의하여 신항서원(莘巷書院)을 창건하였다. 1572년 중부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76년 다시 충청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579년 영릉창봉(英陵參奉)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가 되고 이어 별제(別提)로 옮겼으며, 1581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가 되었다.
1586년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등을 거쳐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589년 장령을 지내고 은진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산과 보은에서 의병 2,000여명을 일으켜 청주에서 적을 격멸,전공을 세웠고, 의주의 행재소에 수집한 군량미를 바쳤다.
그 뒤 청주의 솔재에서 왜적을 대파하였고, 창의사(倡義使)의 호칭을 하사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거두어 배로 운반하여 명나라의 지원군을 도왔다. 뒤에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모계집≫이 있다.
 
7)이대건(李大建, 1550∼157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립(汝立), 호는 오촌(梧村). 원(黿)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증좌승지 경윤(憬胤)이며,어머니는 원주이씨(原州李氏)로 병절교위 은(垠)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증광향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유중영(柳仲郢)이 한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 시행한 시험에서 1등을 하였다. 그 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숙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어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8)김여량(金汝亮, 1603~1683)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오소재(吾巢齋). 어려서부터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1633년(인조 11) 문과에 급제,봉상시 주부(奉常寺 主簿) 겸 승문원 박사를 거쳐 외직으로 나갔다. 1640년(인조 18)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시작으로 1671년(현종 12)까지 32년 동안 해미(海美)·인제·재령·창원·영월 등 12읍의 군수(郡守)·현감(縣監)·부사(府使)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그 공으로 <청백송덕동비(淸白頌德銅碑)>가 세워지고 현종으로 부터 말(馬) 한 필을 하사받았으며, 1672년(현종13)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호조 판서(戶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지금의 서원은 1978년에 중건하고 1984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숭모사(崇慕祠)라는 현판을 걸었고, 마당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참고-청원군지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