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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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옥화서원(玉華書院)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
   이득윤(李得胤) 윤승임(尹昇任) 박곤원(朴坤元) 윤사석(尹師晳)
   1717년(숙종 42)
   
   음력 3월 중정
   
옥화서원은 1717년(숙종 42)에 괴산군수(槐山郡守) 서계 이득윤(西溪 李得胤), 주일재 윤승임(主一齋 尹昇任), 옥계 박곤원(玉溪 朴坤元), 사헌집의(司憲執義) 만둔암(晩遯庵) 윤사석(尹師晳)의 위패를 봉안하고 세운 사당이다.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89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1)주벽-이득윤(李得胤, 1553∼1630)
조선 중기의 역학자(易學者)·악인(樂人).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고려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유학자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우고,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의성현령을 지냈다.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에 머무르면서 김장생(金長生)·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에 거문고에 관련된 명(銘)·부(賦)·기(記)·시(詩)·서(書)·악보·고금금보(古今琴譜) 등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 玄琴東文類記≫라는 귀한 거문고 악보를 후세에 남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선공감(繕工監)의 정(正)이 되고, 이듬해 괴산군수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현금동문유기≫ 외에 저서로 ≪서계집 西溪集≫·≪서계가장결 西溪家藏訣≫이 있다. 특히, 정두원과 나눈 서한의 내용을 담은 ≪현금동문유기≫는 ≪안상금보 安常琴譜≫·≪조성금보 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2)윤승임(尹昇任, 1583∼1688)
호는 주일재(主一齋)이다.

3)박곤원(朴坤元, 1477∼1607)
상서공 박선(尙書公 朴善)의 16세손으로(문원공파) 호(號)는 옥계(玉溪).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 전념한 학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의 옥화서원(玉華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4)윤사석(尹師晳,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돈암(遯菴).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본 그는 사모(紗帽)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청주의 옥화대(玉華臺)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한 수가 전하고 있으며, 이이(李珥)의 행장에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은둔생활을 하는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배향되었다.

지금의 사당은 1989년에 다시 세운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 양회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숭현사(崇賢祠)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마당 앞에 옥화서원(玉花書院) 편액을 내건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았다.


참고-청원군지2006
청원군 사이버 문화재대관 http://culture.puru.ne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w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