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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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노봉서원(魯峯書院)-청원 미복설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송인수(宋麟壽), 정렴(鄭磏), 송시열(宋時烈),
   1615년(광해군 7)
   1662년(현종 3)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양공공 산소 옆에는 노봉서원이 있으며, 노봉서원에 배향되었던 정렴(鄭磏)은 양공공 산소 바로 밑 노산리에서 살았다. 을사사화에서 가장 먼저 억울하게 사화를 입은 이조판서 유인숙도 양공공 산소 바로 아래 노산리 사람이다.
 
설립
광해군2년(1610)에 오시립(吳時立), 오유립(吳裕立), 오명립(吳名立), 보성오씨 일문과 정렴(鄭磏)의 처갓집 자손인 유흥림(柳興霖)이 송인수(宋麟壽)와 정렴(鄭磏)을 모시기 위해 구룡산 자락 노봉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광해군7년(1615)에 완공하고 청액소(請額疎)를 올려 효종9년(1658)에 허락을 받아 현종3년(1662) 사액(賜額, 임금이 현판을 내림, 즉 국가 공인 서원)받았다. 1694년(숙종20) 송준길(宋浚吉, 1706년 검담서원으로 옮김),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 1725년(영조1) 권상하(權尙夏)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송준길은 부용면 검시에 검담서원을 지어서 빠져 나갔다. 오시립, 송시열, 권상하가 원장을 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된 다음 복원하지 못하고, 터에는 노봉서원묘정비(魯峯書院廟庭碑)만 남아 있다.
노봉서원은 청원군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고 가장 먼저 사액(賜額)받았다. 검담서원과 송천서원은 후에 사액받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가치와 비중이 가장 큰데도 복원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던 문인과 석학, 정치인, 충신을 모셔서 그들의 뜻과 학문을 따르던 곳으로 그들의 자취와 글을 듬뿍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료를 발굴하고 복원하여 문화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 노봉서원 자료는 다행히 조선왕조실록, 한수재문집, 규암집, 동춘당문집, 죽천집,송자대전, 지선정유고, 영모재집 등에 남아 있다(현도면지, 1998. 참조)
 
노봉서원 묘정비명(廟庭碑銘) 아울러 서언을 부치다 - 후학 송환기(宋煥簊) 지음
 
문의 고을 북쪽 저산(楮山 저자산, 작두산)에 규암 송선생(宋麟壽)의 옷과 신발을 묻은 묘소가 있고 고을 서쪽 장산(獐山 노산)에는 북창 정선생(北窓鄭先生, 鄭磏)이 숨어 살던 유허가 있다.
지난 경술년(庚戌光海 1610)에 고을 선비 지선정(止善亭) 오명립(吳名立)이 진사 유흥림(進士柳興霖)과 더불어 개연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우리 사림들이 두 선생을 높이 사모하는 데 어찌 이 고을에 사우와 서원을 건립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보며 일으키게 하지 않는가?”하고 시작한 지 5년이 지나 비로소 준공하게 되었다.
이 노봉에는 바위와 골짜기도 있고 뛰어난 숲과 샘도 많으니 여기에 사우를 세우고 제향을 올리면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할 것이라 하여 효종 무술년(1658)에 사액할 것을 청하여 윤허(효종10년 기해(1659))를 받고 현종 임인(1662)년에 편액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므로 사당의 모습과 서원의 규모가 더욱 다시 융성하고 중후해졌다.
그 후 33년 숙종 갑술(1694)년에 우암 송문정선생 (문정공 우암 송시열)을 추후로 받들어 배향했으니 심히 성대한 거사라 하겠다. 아! 아름답지 않은가?
규암선생의 휘는 인수(麟壽)인데 타고난 천품이 도에 가까웠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말씀을 냄과 행동을 제재함이 모두 옛 교훈에 부합되었다. 기묘년(己卯年)에 선비들이 무참히 도륙당한 나머지 사림의 기세가 사라져 버린 때도 홀로 성현을 반드시 배워야 하며 삼대의 정치로써 반드시 복구하여야 한다 하고 그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기기에 이르러서는 기필코 배운 바를 펴서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다가 명종 을사(1545)년에 삭탈관직 당하고 물러와 청주 선영 아래에서 살았는데 한 집에서 도서(圖書)를 마련하고 신명(神明 천지신명)을 대한 듯 했다.
명종 정미(1547)년에 벽서(壁書 규암을 몰아대는 흉서 벽보) 사변이 생겨서 후명(後命 귀양살이할 때 사약을 내림)이 이르매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춘 뒤에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조용히 후명에 임하였다. 문인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르기를 “저 하늘과 땅에게나 가히 마음을 표시할 것이라.”하고 아들에게 교훈을 끼쳐주어 이르기를 “나를 경계 삼아 착한 일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조(宣祖)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특별히 명하여 원통함을 풀어주고 관직을 복구했다. 현종조(顯宗朝)에서는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북창선생(北窓先生)의 휘는 렴(磏)인데 낳으면서 영특하여 널리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선교))를 관통했으나 성학(聖學 유학) 만으로 마음을 정립하는 근본을 삼았다. 공부에 말미암지 않고서도 스스로 고명한 곳에 이르렀으며 여러 기예도 각각 오묘한 위치까지 올랐다.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의 학문은 인륜으로 중요함을 삼고 그 오묘한 곳은 논의하지 않았다. 선․불인즉 마음을 닦고 성품을 보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아래에서 배우는 곳은 전체로 폐지했으니 이것이 3교가 다른 바이다.”
대체로깊은곳까지통하는지식과아득한곳까지잠겼던학문은판에박힌유림과굽은학자는엿볼수있는
바가아니다. 일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울며불며 따랐은즉 충효가 돈독한데서 나왔다 할 것이다. 현감(縣監)의 자리를 물리치고 괘라리(掛蘿里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으니 일민(逸民 숨어 있는 뛰어난 사람)의 청백에도 맞고 권도에도 맞는가?

 우암선생의 휘는 시열(時烈)인데 도학의 정대와 사업의 성대함은 실상 지난 세대를 계승하고 오는 세대를 개척했는데 효종(孝宗)의 물과 물고기 같은 대우에 춘추(春秋 공자가 지은 역사)의 의리를 잡고 세도의 책임을 맡아서 성대하게 백대의 사종(師宗)을 이루었다.
일찍이 본원(本院 노봉서원)에서 오래 동안 원장의 스승 자리에 있으면서 강마(講磨 강론하고 연마함)하고 인도하여 많은 선비를 배출하여 덕화가 성대하였는데 불행이도 황파(黃巴 사약을 내린 지명인 듯)에 화변이 일어나 후학들이 우러를 바가 없다가 경화(更化 신원이 회복됨)되는 초기에 특별이 관직이 복구되고 시호의 하사를 받게 되었으니 조가(朝家 조정)에서 높이 보답하는 것이 지극하였다.
또한 바로 성무(聖廡 문묘)에 배향되었고 정종조(正宗朝)에 이르러서 성대(盛代 성세)의 은전(제사)은 더욱 융성하여 나머지의 유감이 없었다. 한 세대에서는 송자(宋子)로 일컬어 왔다.
아! 선생의 유풍의 여운이 다하지 않았으니 누가 사모하지 않겠는가? 이 서원이 존재하므로써 참으로 높은 산갈이 우러러보는 회포를 부칠 곳이 있어서 깊이 바라보며 의지하는 바가 될 것이다.
동춘 송문정공(宋浚吉)도 역시 정묘(丁卯)년에 추향하였는데 을해(乙亥)년에 서원에 중첩하여 배향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기 때문에 검담(黔潭 부용면 검호리 검담서원)으로 옮겨 봉안했으니 두 서원의 거리가 망창(莽蒼 넓은 들판)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여러 선비들이 능히 함께 존숭하는 성의를 펴게 되었다. 아! 성대한 일이다.
가만히 생각하자면 세 선생(圭菴 北窓 尤菴)의 문정(門庭 속)에 조예는 서로 다르겠으나 요약해 보면 모두 인의로써 성품을 삼고 충효로는 행동을 삼고 성현으로 법도를 삼아 이단을 사절하여 양주(楊朱 이기주의자)와 묵적(墨翟 겸애주의자) (儒家의 이단자들)을 물리쳐서 공로를 삼았으니 바퀴는 다르다 해도 같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체로 이 서원에 들어오는 자는 가히 조심하여 모범을 상상해보지 않겠는가? 서원을 창설한 지도 수 백 년이 되었는데 비로소 희생을 매어 두는 비석(비석에 제사에 쓸 짐승을 매어단다는 뜻) 세우게 되므로 드디어 이와 같이 쓴다.
비석은 지선오공(止善 吳公 명립)의 후손 현섭(鉉燮)이 세우는 일을 맡았는데 비석에 쓰기를
아! 우리 삼현(三賢, 송인수 정렴 송시열)의 뜻은 크다
학문의 바퀴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방향은 같았네.
성조(聖朝 왕조)의 유현(유학자), 밝은 시대의 일민(逸民 숨어사는 능력있는 사람)이네.
남긴 풍도 백년을 내려오며 후세 사람을 일깨우고 도와
사람들이 사모하여 향기로운 제물로 제사 올리는구나
노봉(서원) 바위와 샘은 맑고 깊고
빛나는 서원 곁 담장과 기와에는 이끼도 없구나.
우리 선비들은 길이 바라보고 의지하리라.
 
圭菴先生文集卷之三 附錄 魯峯書院廟庭碑銘 幷序
後學宋煥箕撰
文義之縣北楮山。有圭菴宋先生衣履之藏。縣西獐山。有北窓鄭磏先生薖軸之墟。粤在萬曆庚戌。縣士止善亭吳公名立。與進士柳公興霖。慨然歎曰。凡我士林之尊慕兩先生者。盍設祠院於玆土。使學者日夕瞻望而興起焉乎。爰始經紀。閱五載而竣工。唯玆魯峯。有巖壑林泉之勝。而于以建祠醊侑。允愜群情矣。孝宗戊戌。請額蒙允。顯宗壬寅。宣額賜祭。廟貌院規。益復隆重。後三十三年肅宗甲戌。尤菴宋文正先生。追奉躋享。甚縟擧也。於不休哉。圭菴先生諱麟壽。天姿近道。誠心好學。出言制行。動合古訓。當己卯斬伐之餘。士氣銷鑠之時。獨以聖賢爲必可學。三代爲必可復。至其立朝事君。則期展所學。盡誠殫心。明廟乙巳。削官退處于淸州之先墓下。一室圖書。對越神明。及丁未壁書之變出而後命至。則沐浴具冠帶。顏色不亂。從容就命。貽書門人曰。皇天后土。可表此心。遺訓胤子曰。勿以我爲戒。怠於爲善也。宣廟卽阼。特命伸冤復官。顯廟朝。贈吏曹判書。諡曰文忠。北窓先生諱。生而靈異。博通三敎。全以聖學。爲立心之本。不由工夫。自到高明。以至方技衆藝。各臻奧妙。嘗曰。聖學以人倫爲重。不論其要妙處。仙佛則以修心見性爲本。下學處全闕。此三敎所以異也。凡其玄通之識。沈冥之迹。非局儒曲學所能闚。而事有難言。號泣以隨。則實出於忠孝之篤矣。解縣紱而養疾于掛蘿里。抑亦逸民之中淸中權者歟。尤菴先生
諱時烈。道學之正。事業之盛。實有繼往開來。而膺孝廟魚水之契。秉春秋之義。任世道之責。蔚然爲百代之師宗矣。嘗於本院。久居山長師席。講誘掖。啓迪多士。德化甚盛。不幸黃巴禍作。後學靡所倣仰。逮至更化之初。特蒙復爵賜諡。朝家之崇報。至矣。而亦旣從祀聖廡。至正宗朝。曠世恩典。益無餘蘊。一世以宋子稱焉。嗚呼。三先生之遺風餘韻不沫。百世之下。孰不興慕。斯院之存。儘得以寓高山景行之懷。而永有所瞻依也。同春宋文正公追享。亦曾在丁卯。而乙亥。以其有院享疊設之禁。移奉于黔潭。兩院相距。莽蒼而近。諸章甫。克伸其共尊之誠。猗歟盛矣。竊惟三先生門庭造詣。雖有異焉者。要皆以仁義爲性。而忠孝爲行。聖賢爲法。辭闢爲功。則不害爲殊轍而同歸也。凡入斯院者。可不惕然有以想像模範乎哉。院宇之創。今數百歲。始立牲繫之石。遂書之如此。董成斯役者。止善吳公之來孫鉉燮也。銘曰。猗我三賢。義闡精微。學雖殊轍。道則同歸。聖朝儒賢。明時逸民。遺風百載。啓佑後人。人所興慕。苾芬以祀。唯玆魯峯。巖泉淸邃。有煌院榜。墻瓦莫苔。凡我衿紳。永言瞻依
 
지은이 : 송환기(宋煥箕 1728 영조 4 ∼ 1807 순조 7). 본관 은진(恩津). 자 자동(子東), 호 심재(心齋)·성담(性潭). 송시열의 5대손, 진산군수, 형조참의, 예조참판, 공조판서, 의정부우찬성.심성(心性)의 변(辨)으로 성리학 논쟁시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 편을 들었다.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시호는 문경(文敬). 문집으로 성담집이 있다.

1) 송인수(宋麟壽)
1487(성종 18)~1457(명종 2). 자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庵),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은진(恩津). 21년(중종 16) 문과(文科)에 급제, 26년 수찬(修撰)을 거쳐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재집권을 막으려다가 제주목사(濟州牧師)로 좌천, 34년 병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김안로(金安老) 일당의 미움을 사서 사수(泗水)로 유배되었다.
37년(중종 32) 김안로 등이 제거되자 예조참의(禮曹參議) ∙ 승지(承旨)를 거쳐 병조 ∙ 예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44년 형조참판으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유생(儒生)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그 뒤 대사헌 ∙ 이조참판을 역임, 윤원형(尹元衡) ∙ 이기(李芑)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 다시 대사헌을 거쳐서, 45년 을사사화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서 파면,청주에 은거(남이면 화당리) 중 윤원형 ∙ 이기 등에 의해 사사되었다. 성리학의 대가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2) 정렴(鄭磏)
 
1506(연산군 12)~1549(명종 4). 조선의 학자.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시호는 장혜(章惠). 본관은 온양(溫陽), 30년(중종 2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률(音律)에 밝고, 현금(玄琴)에도 정통하여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로서 가곡(歌曲)의 장단을 지도하는 한편, 천문(天文) ∙ 의술(醫術)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관상감(觀象監) ∙ 혜민서교수(惠民署敎授)를 겸임했다. 뒤에 포천 현감(抱川縣監)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유교 ∙ 도교 ∙ 불교는 물론 복서(卜筮) ∙ 한어(漢語)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통했다. 문장 ∙ 산수화(山水畵)에도 능했다. 제학(提學)에 추증되었다.
정렴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다재다능하여의학, 도학, 유학 모두 달통하였는데 북창집(北窓集), 동탄진주낭(東坦珍珠囊), 유씨맥결(劉氏脈訣), 정북창방(鄭北窓方)등의 저서가 있고 동의보감 사상의 바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허준과 동의보감을 쓰는데도 참여하였다. 북창비결은 용호비결이라고도 하는데 정감록(鄭鑑錄)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렴의 아버지는 문정왕후(여인천하의 전인화) 오빠 윤원형(여인천하의 이덕화)과 한편이 되어 을사사화를 일으킨 정순붕인데, 정순붕은 아들인 정렴의 처삼촌인 노산리 이조판서 유인숙을 가장 먼저 쳐서 없애려고 하였다. 그래서 정렴은 울면서 말렸는데 아버지 정순붕은 듣지 않고 자식 정렴도 죽이려고 하였다.그래서 북창정렴은 처가인 노산리로피신하여은거하다가노산리에서죽었다. 그래서 동네에는 [북창네]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노산을 흐르는 용호강(龍虎江 = 龍湖) 이름을 따서 용호대사(龍虎大師)라 하였고 북창비결도 용호비결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북창의 아들 정지림(鄭之臨)은 딸만 낳았는데 안동 권정기(權正己)에게 시집갔다. 권정기의 손자가 하석리 효자각에 모신 권회인데 후손인 하석 2리의 안동권씨들이 노산리 용뱅이에 있는 정지림의 산소를 외손봉사하여 세향 올려 왔다. 정지림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 정순붕이 무고하게 을사사화를 일으켰다고 하여 조정에서 자손들의 과거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기묘록보유 정순붕전).
노봉서원 밑 금강가 성마루까지의 들과 강건너 대전시 미호동 들까지 각회(角湖)라고 하는데, 북창을 따르는 풍수사(지관)들이 모여서 놀고, 회의를 하던 곳이다. 북창을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여기에 노봉서원 복원은 물론, 사당을 짓고, 선도(仙道), 도교(道敎), 단학(丹學), 풍수지리, 역술 등과 관련된 박물관, 학교, 연구소를 세우고 이들 분야에 대한 유명한 전문가들과 풍수사들이 와서 연구와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관련서적과 기구를 판매하는 시장을 만들고, 구룡산 장승축제와 연관지어 축제를 하면 훌륭한 문화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3)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 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 이어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고 척화론자로 병자호란 때 왕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화의하자 항의표시로 고향에 돌아가서 나오지 않았다. 49년(효종 1) 장령(掌令)에 등용, 비로소 조정에 나갔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한 때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는데, 김자점(金自點)의 무리가 청(淸)나라에 효종이 청나라에 항거하려 한다고 무고하지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58년 다시 조정에 들어가 찬선(贊善)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송시열은 윤휴의 3년 설을 물리치고 남인(南人)이 주장하는 1년으로 결정이 되었으나 이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었다.
효종 다음의 현종(顯宗)도 그를 신임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에 특진시키고,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시켰다. 이어서 좌참찬(左參贊)으로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다. 이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를 에워싸고 말썽이 일자 사임하고 회덕(懷德 옥천)으로 돌아갔다. 다시 이러저런 과정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
숙종(肅宗)때에 덕원(德源) ∙ 웅천(熊川) ∙ 장기(長鬐) ∙ 거제(巨濟) ∙ 청풍(淸風)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오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89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임금께 올린 글이 숙종을 크게 노하여 모든 관작을 박탈당하고 제주(濟州)로 귀양 보냈다가 심문을 하려고 붙들려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읍에서 사약(死藥)을 받고 제자 권상하(權尙夏) ∙ 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죽은지 5년 뒤에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그는 주자학(朱子學)의 대학자였다. 귀양살이의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술에 힘쓰고 학문에 열중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4) 송준길(宋浚吉)
1606(선조 39)~1672(현종 13). 본관 은진.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송시열과 함께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면서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각별한 교분을 맺어나갔다 김장생(金長生)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1633년 잠시 동몽교관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20여 년 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 서인에 속했으며,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공서파(功西派)와의 싸움에 밀려 났다가 1658년(효종 9)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이듬해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했다. 효종이 죽은 뒤 남인들의 공격으로 관직에 발을 끊고 회덕(대전)에 머물러 살면서 여생을 마쳤다. 노봉서원에 모셨다가 부용면 검시의 검담서원으로 옮겼다.
 
5) 권상하 (權尙夏) 
1641(인조 19)~1721(경종 1). 본관 안동. 자 치도(致道), 호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사림파의 거두 유계(兪棨), 송시열, 송준길에게 배웠다. 1659년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문제로1674년(숙종 즉위)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청풍에서 학문에 힘썼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을 때 유품(遺品)을 받고, 그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 즉 화양동서원을 세웠으며,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1703년 찬선(贊善), 이듬해 호조참판,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715년(숙종 41) 가례원류(家禮源流) 사건에 연루되어 소론의 공격을 받아 파직당했으나 노론이 재집권하면서 우의정을 비롯해 여러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