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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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계서원(德溪書院)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464
   이 경(李 璥) 남 추(南 趨)
   1814년(순조 14)
   
   
   
기묘명현으로서 곡성과 인연이 있는 이경(李璥)과 남추(南趨)를 배향하는 사우이다. 처음 1814년(순조 14)에 곡성현감인 심문영(沈文永)이 서계 남주를 제향하는 사우로 곡성을 신월리 서계동(西溪), 남추 선생의 구지에 사우를 세워 서계사(西溪祠)라 하였고, 1818년(순조 18)봄에 이경(李璥)을 추향하였다. 덕계사는 두 선생의 호인 덕암(德巖)과 서계(西溪)의 글자를 딴 것이다
그 후 1868년(고종 5)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훼철됨에 이경의 위패는 본손이 봉안하고 남추의 위패는 땅에 묻고 유지(遺址)에 설단(設壇) 제향하여 왔다. 1950년 이경의 후손인 이재근이 토지 10두락을 기증함으로서 사우 복설의 기금을 마련케 되어 마침내1959년 현 위치인 오지리로 옮겨 복설하면서 덕계사로 칭하게 되었다.

1)주벽-이경(李璥)
종실인 덕암(德巖) 이경 선생은 재주가 뛰어났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조정암(趙光祖)과 교류해 왔는데 정암 선생이 중종 조에 와서 왕에게 바른 왕도(王道)를 전하다가 소인 남곤과 심정의 일파에게 몰려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덕암은 정암 조광조 선생이 그처럼 나쁜 사람이 아님을 상소했다가 도리어 임금께서 화를 내시고 덕암까지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군신들이 덕암을 위해 왕에게 죽이지 말도록 간청한 결과 죽음 대신 해남으로 귀양을 보냈다. 몇 해 후 귀양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곡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맑아 사람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라 생각하고 서울로 가는 길을 멈추어 곡성에서 머물러 살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덕암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자손들도 여기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덕암 이경은 종실이었지만 정암의 뜻이 옳은 것을 알고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정암을 구하려다 오히려 화를 입고 끝내 벼슬을 그만 두고 시골에 묻혀 우매한 백성들을 깨우치는데 일생을 바쳤던 분이다.
 
2)남추(南趨, 생몰년대미상)
호는 서계이며, 곡성군 곡성면 서계리 출신으로 재예와 덕행이 출중하였고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벼슬자리에 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소인인 남곤과 심정이 남추 선생을 불러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마음을 떠보기 위해 분송(굽은 소나무 화분)을 앞에 놓고 시를 짓도록 하자 서계는 서슴지 않고 “수능신여곡 직분모운고(誰能伸汝曲 直奮暮雲高)”라 하였다. 남곤과 심정을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꾀어 바쳐 곡성으로 귀향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추 선생은 남곤과 심정이 있는 한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하며 곡성에서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인종 때 왕의 부름을 받고 전적학사(전국 문서를 맡게 하는 벼슬)를 지내다가 또 다시 명종 때 촉영부(燭影賦)라는 글을 지어서 명종에게 상소하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며 살다가 작고하였다.

사당인 덕계사(德溪祠와) 강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와가로 되어 있는데 1칸은 퇴칸이다.
참고-전라남도교육연구원,

사진-광주·전남 문화관광포털 남도코리아
http://www.namdokorea.com/